[2021 제주 마을탐방] (6)제주시 조천읍 대흘 2리
숨은 달빛이 마을 가득 은은하게 감싸는 곳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입력 : 2021. 10. 25(월) 00:00
달이 숨는다는 뜻을 가진 마을 이름 ‘곱은달’
설촌 기념비에 남아 있는 탄흔… 4·3의 상처

그림 같은 풍경의 인공 연못 ‘못동산못’ 자랑
마을사진전시회 등 마을 만들기 사업 진행 중


낮과 밤 사이 땅거미 지는 어스름이면 해와 달이 하늘을 맞바꾼다. 달은 오름의 만곡을 타고 오르며 은빛 이마를 서서히 내민다. 월광이 대지와 바다에 빛의 실루엣을 휘영청 늘어뜨리기 전까지 제주섬은 박명에 의지해 고요해진다. 밤과 낮 사이 초저녁이 낳은 은은한 박명으로 단장한 고요의 시간을 길게 누리는 마을이 있다. 제주사람들의 입말에 어디에서나 보이는 한라산이 오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마을이 있다고 종종 오르내리지만 이 마을의 달이 그러하다. 그래서 이 마을은 이름조차 달이 숨는다는 '곱은달'이다. 지형이 오목한 분지인 탓에 동틀 무렵 해 또한 궁둥이를 한라산 중턱 가까이 밀어 올려야 드디어 볕이 이 마을 모든 곳에 빛이 닿게 한다고 토박이들은 입을 모은다. 해와 달을 천천히 맞이하는 마을답게 사람의 삶도 자못 느긋하고 후덕한 곳이다.

못동산못의 비경
행정명으로 제주시 조천읍 대흘 2리인 곱은달은 '한흘'이라고 불리는 대흘 1리와 이웃한 마을이다. 현재 190여 세대에 인구는 410여 명이 살고 있으며 동쪽은 선흘리, 서쪽은 와흘리, 남쪽은 교래리, 북쪽은 함덕리와 잇닿아있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감귤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조천읍 관내 12개 마을 중에서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으로 이 마을 사람들의 진취적인 정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대흘 2리의 설촌 역사를 살펴보면 다른 마을과 달리 그 시작이 대체로 명확한 특징을 보인다. 1855년경 함덕리 인근에서 살던 한치민의 일가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설촌됐고 이후 진주 강씨, 제주 고씨, 나주 김씨 등이 차례로 입촌하면서 5년 만에 40호가 넘는 마을로 성장했으며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100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 됐다. 애초에 한치민 일가가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유는 전설 같은 사연으로 전해온다.

대흘2리 본향 못동산당의 전경
한치민은 남 부러울 것 없이 넉넉한 경제력을 지니던 사람이었는데 다만 한 가지 애절했던 것은 후손이 없다는 아픔이었다. 자손을 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한치민은 유명한 지관을 청해 소원을 토로했다. 이에 지관이 여러 곳을 둘러보다 오늘날의 대흘 2리를 가리키며 큰 물이 모이되 마르거나 넘치지 않는 터인 데다 왼쪽의 바농오름과 오른쪽의 새미오름의 맥이 모이는 곳이라 용이 태어날 지맥이라고 말했다. 지관의 말을 들은 한치민이 주저하지 않고 이곳으로 이주한 뒤 2남 2녀의 자식을 얻었다고 한다. 더욱이 토질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고 주변 풍광도 빼어나서 타성바지들이 속속 들어오며 오늘날의 대흘 2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용이 태어날 곳으로 알려진 명당은 '용이좌(龍伊坐)'라고 불리고 있으며 마을의 중심인 곱은달에서 동남쪽으로 약 1㎞ 정도로 떨어진 곳에 있어서 예부터 묏자리를 즐겨 써왔다고 한다.

4·3의 탄흔이 남은 마을 설촌자 한치민기념비
용이좌, 용의 자리 등으로 불리는 명당은 자손을 점지하고 가문을 번창시켜주는 기운을 지녔다고 하지만 시대의 광풍에는 당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1948년 11월 무장대가 조천리를 습격해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우익인사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을 소탕하려고 출동한 토벌대는 대흘리 일대까지 올라와서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했다. 왕대왓목에서 고생길을 비롯한 노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총살을 당했다. 이에 대흘리 주민들은 오름과 동굴 등지로 숨어들었는데 용이좌로 피신했던 15명이 몰살당했다. 이들은 60대 노인부터 어린 아기까지 무장대와는 상관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와 달리 차남동산의 통물홈굴에 은신했던 주민들은 다행히도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생사가 엇갈리는 가운데 마을이 불타고 소개령까지 이어지자 마을은 사실상 폐촌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흐른 뒤 마을 재건사업이 시작되며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와 곱은달, 용의자리, 말통난밧은 복구됐다. 하지만 아립동이라고 불리는 게우선야개는 돌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영원히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다. 4·3의 참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마을을 설촌한 한치민의 공로를 기리는 기념비에도 탄흔이 남아있다.

4·3을 두고 세월이 약이라 비유하기란 가당치도 않은 무정한 말이지만 그것이 약이었다면 망각과 체념의 독약 노릇을 했는지 아니며 회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자극제가 됐는지 대흘 2리는 참담한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은 도로확장 등의 이유로 크기가 줄었지만 마을 중심에 자리한 못동산못의 마르지 않는 생명력이 이 마을 사람들의 기질을 쏙 빼닮은 듯하다. 버드나무와 팽나무 등의 교목이 연못을 에두르며 웃자란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모시풀, 수련, 붕어마름, 가래, 세모고랭이, 개구리밥, 애기부들 등의 수생식물들이 자라는 200평 남짓한 크기의 이 연못은 놀랍게도 마을 설촌 당시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이라고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지금의 두 배 크기인 400평에 이르는 큰 못이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녀를 나눠 목욕하는 구역, 빨래하는 구역, 우마의 물을 먹이는 구역 등을 나눠서 마을 사람들의 생명수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고 한다. 상수도가 들어온 이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이 못을 살뜰히 지켜내며 2006년에는 자연생태우수마을로 지정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못동산못은 아름다움만으로도 대단한 경탄을 자아내지만 정말 놀라운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이 못의 소유주가 강용동이라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애초에 연못부지를 기증한 사람이 강씨인데 그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고 연못을 영원토록 지켜내리라는 염원을 모아 마을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용동을 하나로 붙여 '강용동'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마도 제주를 비롯한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이런 연못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고임성 이장
고임성 이장은 본인이 직을 맡은 지 6개월밖에 안 돼서 아직은 마을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하는 중이라고 겸손한 인사를 하며 못동산못과 그 너머의 본향당으로 이끌었다.

"못동산당이 우리 마을의 본향당인데 예전에는 마을에 살던 삼싕할망(아이들의 질병을 영적으로 치유하고 집안의 안택을 기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당굿을 맡았었는데 그 분이 돌아가신 뒤로 굿이 끊겼다. 한두 집안이 다니는 듯한데 이 당의 내력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임성 이장이 안내한 곳은 엄청난 크기의 아름드리 팽나무를 중심으로 겹담으로 튼튼하게 쌓은 신당이 자리해 있었다. 못동산못, 마을운동장과 지척인 이곳을 잘 정비해 마을사람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찾아와 대흘 2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를 소망하는 그이는 아직은 공부 중이라면서도 내심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마을주민 50%에 이르렀다. 그런데 토박이들과 왕래를 하거나 교분을 쌓는 이들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사업들을 구상 중이다. 조천읍주민자치위원회의 예산을 유치해 못동산못을 재정비하고 이를 토대로 생태환경프로그램 등을 선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미 2019년부터 곱은달 마을사진전시회 등을 성황리에 펼치는 등 다양한 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며 자연과 사람이 공생하는 마을을 꿈꾸는 대흘 2리, 이 마을은 강용동이란 이름의 못동산못처럼 자연이 사람이고 사람이 자연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새삼 일깨우는 달빛 고운 마을이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팟캐스트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