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98)성산읍 온평리
입력 : 2025. 10. 17(금) 02: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탐라 개국신화의 배경이자 정신적 고향
[한라일보] 신화의 배경이 된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을 가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삼신인이 벽랑국 3공주를 온평리 해안가 연혼포에서 맞아들여 혼인지에서 합동으로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섬 제주 스토리텔링의 정점에 놓여 있다. 혼례를 올리고 신방을 차렸다는 신방굴은 입구가 하나지만 들어가면 세 개의 동굴로 나뉜다. 이런 이야기를 외국인들에게 설명하면 참으로 로맨틱하게 받아들이는 표정을 볼 수 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는 문자 기록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신화라는 형식을 빌어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렵생활을 하던 세력이 바다 너머에서 가축과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온 농경세력과 갈등이나 전쟁이 아니라 평화롭게 결합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갔다는 탐라 개국 시기의 마인드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다. 그 융합의 시발점이요 배경 무대가 온평리라고 하는 사실을 신화 속에 명문처럼 새겨놓았다. 역사적으로 수렵과 농경이 만나서 해양세력이 번창했을 것 같은 이 지역에서 화합을 모색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가슴 벅차다. 이른바 씨족사회에서 부족연맹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토대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탐라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화갈색 토기가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온평리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화도 사람이 사는 곳에서 생성되는 것이니까.

강대훈 온평리 이장
마을 명칭은 열운이, 열온이, 열혼포 등 다양하게 불리어 왔다.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7㎞에 육박해 제주도 해안마을 중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취락은 일주도로변에서 바닷가를 따라 약 3㎞ 정도 길게 형성돼 있다. 해안선이 길어서일까 환해장성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다. 말등포연대와 같은 역사문화 자원들이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산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이미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아 경쟁력 강한 농어촌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큰 마을 자원은 해안도로를 낀 독특한 경관이다. 학술용어로 '파호이호이 용암류지대' 발달이 두드러진다. 넓은 암반조간대를 갖는 해안은 용암류 단위가 잘 발달돼 있으며 용암류 표면에는 새끼줄 구조를 관찰할 수 있다. 황루알 북쪽 냇빌레 지역은 바다 쪽으로 약 200~300m 검은 돌들로 조간대가 평평하게 발달돼 있어 신비할 정도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똔여'라는 해안에는 등표가 바닷속에 세워져 있다. 밀물 때에는 밑 부분이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에는 노출되는 형태다. 온평마을 포구인 '개맛'에는 두 곳에서 용천수가 솟아난다. 바다가 길고 넓어서 해조류, 어패류, 어류 등 수산자원이 풍부해 주민 중 상당수가 어업소득으로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공통적으로 설명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엄격한 불문율이 지배한다. 이간질을 가장 배척하는 전통적 풍토. 그것이 세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마을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다.

강대훈 이장에게 온평리가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집단적 승부욕'이라고 대답했다. 주변 마을들이 온평리에 대해 제주어로 '모다들기' 선수들이라 혀를 내두른다. 다른 마을과의 경쟁에서 지고는 못사는 사람들. 단순하게 결속력이나 단결력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부족한 '정신적 결합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도 단위 문화행사에서 다른 지역은 읍면의 각 마을에서 차출하거나 연합해 참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성산읍은 온평리민들만 참여를 해도 그 정도의 인원과 역량이 발휘된다고 하니 아직도 수눌음공동체 정신이 왕성하게 살아 있는 마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천혜의 자연자원과 역사, 신화적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제주의 대표적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바탕이 충분한 마을. 혼인지를 단순하게 삼성신화의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탐라국이라고 하는 고대국가의 형성과 성격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관광자원으로 성장시켜야 할 숙제를 결국 행정당국의 인식전환에서 찾는다. <시각예술가>



혼인지축제 청사초롱 든 나무
<수채화 79㎝×35㎝>

10월 18일부터 19일 사이에 마을축제가 있으니 곳곳에 청사초롱이 걸려 있었다. 제15회 혼인지 축제를 마을공동체가 준비하는 과정이요, 분위기를 그린 것이다.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 나무가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추상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각도를 정확하게 잡고서 보면 흡사 마을 사람들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느낌이 들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린 것이다. 저 오래된 나무와 같이 뿌리 깊게 살아온 어르신이 마을에서 관광문화축제로 발전시키는 '혼인지 축제'에 작은 역할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한 달 전부터 저렇게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 정성. 그 애향심이 청명한 가을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초롱불빛이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문득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등불이 떠오른다. 그가 이 모습을 보면 기가 죽어서 허리를 굽힐 정도의 한낮의 등불. 온평리를 돌아다니며 혼인지축제와 관련한 풍경화를 그리려고 며칠을 헤맨 끝에 이런 놀라운 어르신을 만날 수 있어서 한편으로 영광이요 행운이다.

청사초롱이 가지는 도드라진 보색대비와는 대조적으로 주변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정겹다. 소실점 끝에는 바닷가 정자와 아스라이 수평선이 보이고 길은 등불보다 밝게 빛난다. 신화를 향유할 수 있는 21세기 마을이 과연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될까? 행복이라고 하는 단어는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정서의 총량과 질적 풍요에서 오는 것이라 확신하게 되는 마을에서 감히 그린.



신화 속 바닷가
<연필소묘 79㎝×35㎝>

검은 현무암들로 이뤄진 온평리의 해변을 반짝이는 윤슬과 함께 그리는 것은 그 자체로 신비주의에 대한 열망이다. 빛나는 수평선 너머 '푸른 파도의 나라' 벽랑국에서 세 분의 공주님이 오고 계신다. 더 큰 풍요를 찾아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시집을 온 바닷가. 그리는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기원전 1세기 이전의 탐라 개국을 알리던 시기로 날아가 있었다. 고대 해양교역세력들이 저 검은 암반지대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연상하며 그렸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탐라국은 해상무역 등이 왕성한 개방국가였다. 삼성신화라는 테마 속에 온평리 혼인지를 등장시킨 이유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 상징성. 탐라국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존재를 투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탐라국의 경제적 관문이며 가장 왕성한 발전지역이었기에 그 위상에 걸맞은 상징성을 이 바닷가에 부여하기 위해 벽랑국 공주들이 여기로 들어왔다고 신화적 서사성을 부여했으리니. 성산일출봉에서 멀리는 표선까지 거대한 활꼴 형태의 만이 형성된다. 그 중심에 있는 바닷가. 단순한 검은 바위 군락이 아니라 저 존재가 간직한 시간적 메시지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구조물을 역사 유물로 바라보는 저급한 시각으로 온평리 바닷가 파호이호이 해변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바다가 검어서 바닷가 윤슬이 가장 눈부신 바다. 그 바다가 영광스럽게 빛난다. 천혜의 고대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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