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미소를 지은 죄
입력 : 2011. 11. 02(수) 00:00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의 위령제 소식을 전하는 여자 아나운서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 작은 표정 변화가 일파만파(一波萬波)를 불렀다. 항의가 빗발쳤고, 그녀는 끝내 사과를 했다.

늘 하던대로 시청자들에게 다정히 군다는 것이 그런 표정이 됐을 것이다. 철학자 싸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직업의 '의식(儀式)'에 충실했던 것 뿐이다.

싸르트르가 예를 든 직업은 아나운서가 아니라 클럽 웨이터였다. 해당 대목을 그의 책 '존재와 무'에서 읽어 보자.

"그는 좀 지나치게 민첩(敏捷)한 걸음걸이로 손님 앞으로 다가온다. 그는 약간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절을 한다. 그의 목소리, 그의 눈은 손님의 주문에 좀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인다. 마침내 주문한 것이 나온다. 그는 그의 걸음걸이 속에서 어딘가 모르게 로봇과 같은 어색하고 뻣뻣한 태도를 본뜨며 곡예사와 같은 가벼운 몸짓으로 접시를 날라온다. 접시는 항상 불안정한, 균형을 잃은 상태가 되지만, 웨이터는 그때마다 팔과 손을 가볍게 움직여서 부단히 접시의 균형을 회복한다. 그는 자기의 동작들을 마치 상호작용하는 기계처럼 연결시키려고 애쓴다. 그의 몸짓과 그의 목소리까지도 기계장치와 같아 보인다."

싸르트르에 의하면, 이 기계화를 통해서 웨이터는 자신의 신분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요, 아이들의 엄마요, 누군가의 친구 등등이다. 그러나 방송국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것들은 다 의미가 없어진다. 마치 자동카메라의 조리개가 피사체의 광도(光度)에 자동 조절되듯, 그녀의 모든 것은 아나운서라는 신분에 자동으로 맞춰진다. 그 중에는, 시청자 앞에서 미소를 지어야 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날 그녀의 안면 근육은 그런 매뉴얼에 따라 '늘 하던대로' 자동으로 작동했던 것뿐이다. 그래서 그날 그녀의 표정은 바뀐 뉴스의 분위기를 즉각 느낄 수 없었다.

'늘 하던대로' 그것이 문제다. 10.26 보궐선거에서 민심은 요동쳤다. 그러나 정치권은 느끼지 못하고, '늘 하던대로'다. 다른 말로, 구태의연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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