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매맞는 것이 힘이다
입력 : 2011. 12. 02(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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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월가 시위를 보며 필자는 이렇게 썼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격화다. 보도블럭을 깨어 손에 쥐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진압이 개시되고, 군중의 이탈(離脫)이 시작된다. 그 끝도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정예의 장렬한 최후다. 이런 역학을 누구보다도 꿰뚫는 곳이 있다. 국가권력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격을 유도(誘導)하기도 한다. 그러면, 흥분 상태에 있는 시위대는 너무나 쉽게 말려든다."
10월 21일자 '세상읽기'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우려가 현실이 됐다. 장소만 옮겨서.
경찰서장이 시위군중 속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다. 경찰은 당장 물대포를 쏠 구실이 생겼다. 시위대의 이탈도 시작됐다. 이 사건 뒤 반FTA 집회는 참가자가 3분의 1로 확 줄었다.
정복(正服)을 차려입은 경찰서장이 시위군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를 두고 시위 주최측은 서장이 폭력사태를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설마 동기는 아닐 테지만, 결과는 그런 셈이 됐다. 동기가 순수했다면 오히려 더 문제다. 들불처럼 흥분한 군중 속으로 방염(防炎) 장치도 없이 뛰어든 것은 무모(無謀)한 용기였다.
시위대는 더욱 잘한 것 없다. 그들의 주장처럼 서장이 폭력을 유도를 했다면, 그들은 제대로 낚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위대는 유죄다. 생각하는 갈대가 '생각없이' 낚시바늘을 덥석 문 죄다.
그러면 항의할 것이다. 그것이 낚시바늘인 줄 어떻게 아냐고. 모를 게 뭐 있는가. 특별한 예지(豫知)가 있어 이런 사태를 예고했던 것 아니다. 필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상식이 뭔가. 보통사람의 지식이다. 보통사람 누구나 아는 것을 몰랐다면, 모른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폭력 시위는 자기모순이다. 불복종 운동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드는 것이다. 폭력은 강자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약자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권력에 맞서는 힘은 오히려 맞는 데서 나온다. 약자가 맞을 때 강자의 괴물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격화다. 보도블럭을 깨어 손에 쥐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진압이 개시되고, 군중의 이탈(離脫)이 시작된다. 그 끝도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정예의 장렬한 최후다. 이런 역학을 누구보다도 꿰뚫는 곳이 있다. 국가권력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격을 유도(誘導)하기도 한다. 그러면, 흥분 상태에 있는 시위대는 너무나 쉽게 말려든다."
경찰서장이 시위군중 속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다. 경찰은 당장 물대포를 쏠 구실이 생겼다. 시위대의 이탈도 시작됐다. 이 사건 뒤 반FTA 집회는 참가자가 3분의 1로 확 줄었다.
정복(正服)을 차려입은 경찰서장이 시위군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를 두고 시위 주최측은 서장이 폭력사태를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설마 동기는 아닐 테지만, 결과는 그런 셈이 됐다. 동기가 순수했다면 오히려 더 문제다. 들불처럼 흥분한 군중 속으로 방염(防炎) 장치도 없이 뛰어든 것은 무모(無謀)한 용기였다.
시위대는 더욱 잘한 것 없다. 그들의 주장처럼 서장이 폭력을 유도를 했다면, 그들은 제대로 낚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위대는 유죄다. 생각하는 갈대가 '생각없이' 낚시바늘을 덥석 문 죄다.
그러면 항의할 것이다. 그것이 낚시바늘인 줄 어떻게 아냐고. 모를 게 뭐 있는가. 특별한 예지(豫知)가 있어 이런 사태를 예고했던 것 아니다. 필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상식이 뭔가. 보통사람의 지식이다. 보통사람 누구나 아는 것을 몰랐다면, 모른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폭력 시위는 자기모순이다. 불복종 운동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드는 것이다. 폭력은 강자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약자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권력에 맞서는 힘은 오히려 맞는 데서 나온다. 약자가 맞을 때 강자의 괴물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