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시위도 아트다
입력 : 2011. 10. 21(금) 00:00
TV 화면에 비친 반(反) 월가 시위대 사이에서 '99'라고 쓴 피켓이 여럿 눈에 띈다. 미국민 99%의 절망과 분노를 나타내는 숫자다. 그저 상징적인 숫자려니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통계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절망하고 분노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 국부(國富)의 23%는 상위층 1%의 소유다. 그들은 99%의 국민과 드높은 담을 쌓고 제왕처럼 혹은 외계인처럼 산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가진 부를 과시(誇示)하고, 보란 듯 탐욕을 뽐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득의 추세다. 실질소득의 추세를 나타내는 통계 곡선이, 최하위에서 상위 99%까지는 거의 수평에 가깝다. 그래프를 그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제주시 지형으로 치면 그 경사도(傾斜度)가 관덕정에서 서문로터리 구간과 비슷하다.

그 반면에 최상위 1%의 소득은 그 성장세가 몹시 가파르다. 마치 용눈이 오름 찍고 다랑쉬 오름 위로 치닫는 기세다. 오름의 비유가 도외 독자는 낯설 것이다. 양해(諒解)를 구한다.

99%가 화나게 생겼다. 그러나 구호만 외친다고 세상이 바뀔까. 바꿀 수 없다면 봉기(蜂起)를 할까. 아침 뉴스는 벌써부터 시위대 내부에서 의견 충돌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럴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과격화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되는 것은 없다. 뭔가 시도를 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보도블럭을 깨어 손아귀에 쥐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무력진압이 개시되고, 군중의 이탈(離脫)이 시작된다. 군중의 숫자가 줄면 시위는 더욱 격렬해진다. 그것의 끝도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정예의 장렬한 최후다. 일본 적군파가 그랬다.

이런 과정을 누구보다도 꿰뚫는 곳이 있다. 국가권력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격을 유도(誘導)하기도 한다. 그러면, 늘 긴장과 흥분 상태에 있는 시위대는 너무나 쉽게 말려든다.

에릭 프롬은 사랑도 '아트'라고 했다. 시위도 그렇다. 남의 일만 같지 않아 한 꼭지 썼다.

<문학평론가>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298 왼쪽숫자 입력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송상일의 세상읽기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