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노벨상 받은 하이쿠
입력 : 2011. 10. 19(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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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고은(高銀) 시인은 올해도 그렇게 지나갔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에게 갔다.
필자의 컴퓨터를 켜면 바탕화면에 뜨는 글귀가 있다.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의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유롭게 놔 주라. 돌아오면 그는 그대 사람이다. 안 돌아오면 그는 처음부터 그대 사람이 아니었다." 상(賞)도 그렇다.
받으면 좋고 못 받아도 그만인 것이 상이다. 선생 자신은 그깟 상에 초연(超然)할 텐데, 매스컴이 놔두질 않는다. 나무는 가만 있으려 해도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 격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필자에게 트란스트뢰메르는 생소한 이름이다. 그만큼 필자가 세계문학에 어두웠음이다. 신문에 실린 그의 시를 읽었다. 우리말로 옮긴 시가 원시(原詩)와 맛이 다르리라는 것은 감수하고 읽었다. 제목이 ''하이쿠'다. 하이쿠(俳句)는 일본의 전통시형이다. 특징은 시가 극도로 짧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운(餘韻)이 길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도 그랬다.
"송전선이 뻗어 있다/서리의 왕국, 모든 음악의 북쪽에/해가 낮게 걸려 있다/그림자가 거인이다/머잖아 모두 그림자/자줏빛 난초꽃들,/유조선이 미끄러져 지난다/달이 꽉 찼다/잎새들이 속삭인다/멧돼지 하나 오르간을 연주한다/종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지레 절망하지 말자. 평생 문학 공부를 한 필자도 모르겠기는 매한가지다.
정작 절망스러운 것은 그가 그의 나라의 '국민시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부러운 것은 노벨상이 아니라 그런 국민이다. 노벨상은 수상자와 그의 나라 국민이 함께 받는다는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다.
혹 비교해서 읽으면 감상을 도울까 하여 하이쿠 한 수(首)를 소개한다. 지은이는 17세기 하이쿠의 명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다.
"이 길은/아무도 가지 않는다/이 가을 저녁에."
이것이 시의 전부이다. 저명한 독일 신학자 하인리히 오트는 이 시를 읽고 "일본말은 몰라도 느껴진다"고 했다. 우리도, 느껴보자.
<문학평론가>
필자의 컴퓨터를 켜면 바탕화면에 뜨는 글귀가 있다.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의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유롭게 놔 주라. 돌아오면 그는 그대 사람이다. 안 돌아오면 그는 처음부터 그대 사람이 아니었다." 상(賞)도 그렇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필자에게 트란스트뢰메르는 생소한 이름이다. 그만큼 필자가 세계문학에 어두웠음이다. 신문에 실린 그의 시를 읽었다. 우리말로 옮긴 시가 원시(原詩)와 맛이 다르리라는 것은 감수하고 읽었다. 제목이 ''하이쿠'다. 하이쿠(俳句)는 일본의 전통시형이다. 특징은 시가 극도로 짧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운(餘韻)이 길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도 그랬다.
"송전선이 뻗어 있다/서리의 왕국, 모든 음악의 북쪽에/해가 낮게 걸려 있다/그림자가 거인이다/머잖아 모두 그림자/자줏빛 난초꽃들,/유조선이 미끄러져 지난다/달이 꽉 찼다/잎새들이 속삭인다/멧돼지 하나 오르간을 연주한다/종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지레 절망하지 말자. 평생 문학 공부를 한 필자도 모르겠기는 매한가지다.
정작 절망스러운 것은 그가 그의 나라의 '국민시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부러운 것은 노벨상이 아니라 그런 국민이다. 노벨상은 수상자와 그의 나라 국민이 함께 받는다는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다.
혹 비교해서 읽으면 감상을 도울까 하여 하이쿠 한 수(首)를 소개한다. 지은이는 17세기 하이쿠의 명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다.
"이 길은/아무도 가지 않는다/이 가을 저녁에."
이것이 시의 전부이다. 저명한 독일 신학자 하인리히 오트는 이 시를 읽고 "일본말은 몰라도 느껴진다"고 했다. 우리도, 느껴보자.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