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1000억'을 보는 두 가지 시선
입력 : 2011. 10. 14(금) 00:00
안철수씨가 1000억대 부자가 됐다. 그렇게 됐냐 하고는 지나칠 그런 뉴스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것을 보도한 신문들의 태도다. 같은 사실을 보수 신문은 크게, 진보 신문은 작게 다뤘다. 신문일을 오래 하다 보면 별것이 다 눈에 들어온다.

보수 신문이 기사를 키운 속내는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이래도 안철수가 서민의 편이냐." '1000억 안철수'는 진보 신문도 내심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기사가 잦아든 이유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돈에 관한 생각이다.

선비는 기녀의 '꽃값'을 젓가락으로 집어 건넸다. 자고(自故)로 우리는 돈이 더럽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더러운 것을 몹시 갖고 싶어 한다. 관념과 욕망의 괴리(乖離)다.

어떤 돈은 1000억도 떳떳하고, 어떤 돈은 그 1000분의 1도 부끄럽다. 받긴 했으나 '대가성은 없었다'는 돈은 경험칙상(經驗則上) 십중팔구가 후자에 속한다.

둘째는 신문에 관한 생각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달려라 엄복동'의 그분이었는가는 확실치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자전거 경주가 열렸다. 조선인 선수가 간발(間髮)로 앞서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인 심판은 일본인 선수의 우승을 선포했다. 당장 소동이 났다. 그러나 아직 카메라 판정이 없었던 시절이다. 항의가 안 통했다. 그때 관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신문기자에게 물어봅시다. 여기 신문기자 없습니까."

조선인 신문기자가 한 명 있었다. 기자가 일어나서 조선인 선수가 빨랐다고 증언했다. 그러자 심판도 더 이상 뻗대지 못하고 판정을 번복(飜覆)했다. 실화다.

당시 관중과 심판은 공히 신문의 공정보도를 믿었다. 그랬기에 기자의 증언이 카메라 판정과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신문이 지금은 진보니 보수니로 갈려 선전지 꼴이 다 됐다. 보수와 진보의 편가르기는 요즘 와서 극에 달한 느낌이다. 바야흐로 선거철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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