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데이비드 씨가 죽어야 할 이유
입력 : 2011. 09. 23(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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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자 고(故) 김동화 박사는 그의 '불교 교리사'에서, 불교 2500년은 무아(無我)와 윤회(輪廻)의 모순과 씨름한 역사라고 했다. 저자는 묻는다. '나'가 없는데, 누가 윤회를 하는가.
풀기 힘든 문제다. 그래도 윤회는 내버릴 수가 없다. 선악에는 응보(應報)가 반드시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회나 기독교의 사후심판이나 모두 인간이 타고나는 한 가지 요구에 부응하는 교리다. 질서에 대한 요구 그것이다. 질서가 뭔가.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즉, 원인과 결과가 상응하는 것이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무당은 무엇보다도 원인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예컨대 마을에 괴질(怪疾)이 돌면, 무당은 주술을 통해 그 원인을 찾아내 조치한다. 그러면 마을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알고 보면, 오늘날 법이 하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무질서를 초래한 원인을 찾아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법이 하는 일이다. 인류학자의 눈으로 보면 판검사는 법복을 입은 무당이다.
판검사는 직업적으로, 그 나머지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건의 원인을 궁금해 한다. 그 궁금증은 너무나 커서, 못 찾으면 만들어내서라도 원인을 확보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사람들은 비로소 안정감을 되찾아 일상을 영위(營爲)할 수가 있다.
이 글이 인쇄돼 나왔을 즈음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트로이 데이비스 씨의 사형집행에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경찰관을 살해한 혐의다. 그러나 정녕 그가 범인일까. 목격자라고 나섰던 증인 대부분이 진술(陳述)을 바꿨다. 물증도 없다. 그렇지만 TV에 나온 유족은 외쳤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형 집행뿐이다."
진실은 필자도 모른다. 어쨌든 보도된 사실만 보면, 데이비스 씨는 범인이 아닐 수 있다. 그런 그를 어째서 법은 기어이 죽이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이럴 것이다. 질서 회복에 대한 열망. 그 열망에 비하면 진실은 그다지 중요치가 않다.
4·3 때도 숱한 제주 사람이 질서 회복의 미명하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문학평론가>
풀기 힘든 문제다. 그래도 윤회는 내버릴 수가 없다. 선악에는 응보(應報)가 반드시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회나 기독교의 사후심판이나 모두 인간이 타고나는 한 가지 요구에 부응하는 교리다. 질서에 대한 요구 그것이다. 질서가 뭔가.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즉, 원인과 결과가 상응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오늘날 법이 하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무질서를 초래한 원인을 찾아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법이 하는 일이다. 인류학자의 눈으로 보면 판검사는 법복을 입은 무당이다.
판검사는 직업적으로, 그 나머지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건의 원인을 궁금해 한다. 그 궁금증은 너무나 커서, 못 찾으면 만들어내서라도 원인을 확보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사람들은 비로소 안정감을 되찾아 일상을 영위(營爲)할 수가 있다.
이 글이 인쇄돼 나왔을 즈음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트로이 데이비스 씨의 사형집행에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경찰관을 살해한 혐의다. 그러나 정녕 그가 범인일까. 목격자라고 나섰던 증인 대부분이 진술(陳述)을 바꿨다. 물증도 없다. 그렇지만 TV에 나온 유족은 외쳤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형 집행뿐이다."
진실은 필자도 모른다. 어쨌든 보도된 사실만 보면, 데이비스 씨는 범인이 아닐 수 있다. 그런 그를 어째서 법은 기어이 죽이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이럴 것이다. 질서 회복에 대한 열망. 그 열망에 비하면 진실은 그다지 중요치가 않다.
4·3 때도 숱한 제주 사람이 질서 회복의 미명하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