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전짓불 앞에서
입력 : 2011. 08. 03(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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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소설 '소문의 벽(壁)'에 소개된 이야기다.
6.25가 터진 직후다. 어느날 밤 경찰인지 공비(共匪)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어머니하고 주인공이 잠든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은 눈부시게 밝은 전짓불을 어머니의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다그친다. 어머니는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답을 잘못 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어느 편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훗날 주인공은 말한다.
"그때 어머니는 절망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하여 제주사람들은 마치 전짓불 앞에 놓인 그 어머니의 형국이다. 기지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부터 공(共)히 태도를 밝히라는 강요를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판하는 입을 막는 것이 언론탄압의 기본이다. 더 지독한 탄압은 상대방의 얼굴에 전짓불을 들이밀고 침묵조차 허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찬반이 미결(未決)인 채로-혹은 표명을 보류한 채로-이것은 이야기할 수 있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제주해군기지를 저지(沮止)하는 세력은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사실상 북한 김정일의 꼭두각시 종북세력이라고 했다. 4.3 때 제주에서는 수 만명의 애꿎은 목숨들이 그런 식으로 지목(指目)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어디 종북세력 뿐이겠는가. 지정학적으로 판단컨대, 여차하는 날에 제주기지는 대북 효용보다 대일 효용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지금처럼 일본이 '독도는 내 것'이라며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는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을 친일세력으로 모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일 것이다.
그리고 종북과 친일의 양극(兩極) 사이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종북 운운 단정하는 것은 의미론적 횡포다. 미국 언어학자 S. I. 하야카와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적을 오직 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심성이 병든 사람이다. <문학평론가>
6.25가 터진 직후다. 어느날 밤 경찰인지 공비(共匪)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어머니하고 주인공이 잠든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은 눈부시게 밝은 전짓불을 어머니의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다그친다. 어머니는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답을 잘못 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어느 편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훗날 주인공은 말한다.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하여 제주사람들은 마치 전짓불 앞에 놓인 그 어머니의 형국이다. 기지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부터 공(共)히 태도를 밝히라는 강요를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판하는 입을 막는 것이 언론탄압의 기본이다. 더 지독한 탄압은 상대방의 얼굴에 전짓불을 들이밀고 침묵조차 허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찬반이 미결(未決)인 채로-혹은 표명을 보류한 채로-이것은 이야기할 수 있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제주해군기지를 저지(沮止)하는 세력은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사실상 북한 김정일의 꼭두각시 종북세력이라고 했다. 4.3 때 제주에서는 수 만명의 애꿎은 목숨들이 그런 식으로 지목(指目)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어디 종북세력 뿐이겠는가. 지정학적으로 판단컨대, 여차하는 날에 제주기지는 대북 효용보다 대일 효용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지금처럼 일본이 '독도는 내 것'이라며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는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을 친일세력으로 모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일 것이다.
그리고 종북과 친일의 양극(兩極) 사이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종북 운운 단정하는 것은 의미론적 횡포다. 미국 언어학자 S. I. 하야카와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적을 오직 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심성이 병든 사람이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