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사회학, 길에서 배우다
입력 : 2011. 07. 20(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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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로 대학가가 시끄럽던 무렵, 원로 사회학자 고영복 선생은 우리나라가 지금 세대간의 과도기적 갈등을 겪는 중이라고 했다. 학생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투쟁을 폄훼(貶毁)하는 섭섭한 말씀으로 들릴 수 있었다. 선생의 주장은 필자에게도 분명치 않았는데, 요즘 그 진실을 새삼 깨닫는 중이다.
미국 사는 외손자가 여름방학 동안 엄마 따라 와서 같이 지내는데, 아이가 자동차를 몹시 아슬아슬해 한다. 그러는 이유를 필자는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적어도 이 아이가 사는 도시에서는-자동차가 사람을 피해서 간다. 당연한 원칙 아닌가 할 수 있으나, 특이한 점은 그 원칙이 심하게 철저히 지켜진다는 사실이다. 횡단보도에서는 말할 것 없고 차도변에 사람이 서 있어도 멀찌감치서-아주 멀찌감치서-일단 차를 세워 사람의 동향(動向)을 살핀다. 모든 평가는 상대적이지만 부인키 어렵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 교통은 아직까지도 '차 위주'다.
이어령 선생이 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인의 의식 풍경을 선생 특유의 재치로 그려낸 책이다.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돼 뇌리에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자동차를 피해 공연히 달아나는 시골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상하게 잊히지가 않는다.
치이면 치인 자만 손해다. 그러나 보행자가 차를 피하는 심리학적 이유들도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차를 탄 사람은 걷는 사람보다 경제적 능력이 있고, 따라서 신분적으로도 우월(優越)하다는 인식이다.
그런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운전을 하고 다녀보면 젊은이들은 차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시선을 스마트폰에 고정시킨 채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길을 건넌다. 나는 간다, 차가 피하라는 식이다.
위험한 일이고 운전자 입장에서는 짜증도 나지만, 차 위주에서 사람 위주로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두 개의 문화가 혼재(混在)한다. 횡단보도 건너기가 겁나는 필자의 외손자는, 선생이 말했던 '과도기'의 피해자인 셈이다. <문학평론가>
미국에서는-적어도 이 아이가 사는 도시에서는-자동차가 사람을 피해서 간다. 당연한 원칙 아닌가 할 수 있으나, 특이한 점은 그 원칙이 심하게 철저히 지켜진다는 사실이다. 횡단보도에서는 말할 것 없고 차도변에 사람이 서 있어도 멀찌감치서-아주 멀찌감치서-일단 차를 세워 사람의 동향(動向)을 살핀다. 모든 평가는 상대적이지만 부인키 어렵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 교통은 아직까지도 '차 위주'다.
이어령 선생이 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인의 의식 풍경을 선생 특유의 재치로 그려낸 책이다.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돼 뇌리에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자동차를 피해 공연히 달아나는 시골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상하게 잊히지가 않는다.
치이면 치인 자만 손해다. 그러나 보행자가 차를 피하는 심리학적 이유들도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차를 탄 사람은 걷는 사람보다 경제적 능력이 있고, 따라서 신분적으로도 우월(優越)하다는 인식이다.
그런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운전을 하고 다녀보면 젊은이들은 차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시선을 스마트폰에 고정시킨 채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길을 건넌다. 나는 간다, 차가 피하라는 식이다.
위험한 일이고 운전자 입장에서는 짜증도 나지만, 차 위주에서 사람 위주로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두 개의 문화가 혼재(混在)한다. 횡단보도 건너기가 겁나는 필자의 외손자는, 선생이 말했던 '과도기'의 피해자인 셈이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