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결국은 '사람'이다
입력 : 2011. 05. 27(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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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는 신자와 사제가 1대1로 직접 만나 고백을 해야 한다. 로마 교황청의 유권해석에 의하면, 전화나 이메일로 하는 간접 고백은 무효다.
래리 킹의 이야기도 이 '직접 만남'에 관한 것이었다. 셔츠 바람에 멜빵을 맨 늘 그 차림으로 CNN 토크 쇼를 25년간이나 이끈 노(老) 저널리스트의 위트와 품위에 반해 필자도 오래 전부터 이 노인의 팬이다. '서울디지털포럼'에 온 그는 말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와 있는가. 주최측은 나에게 1등급 항공권과 아름다운 호텔을 제공했다. 위성(衛星)을 통해 연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만큼 중요한것은 없다. 최첨단 기술이 발전해도 아직까지는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이 필요하다."
래리 킹이 말한 '사람'은, 스페인 철학자 우나무노가 그의 명저 '삶의 비극적 감정' 서두에서 말했던 그 '인간'이다. 우나무노는 말했다. "우리라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 따위의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를 지닌 그런 인간이다." 래리 킹이 말한 '사람'은 바로 그 '살과 뼈를 지닌' 인간이다.
필자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칼로 베면 피가 흐르고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그런 인간을 가리킨다.
우나무노나 래리 킹이 우려하는 것은, 사람의 사람에 대한 이 놀라운 감수성(感受性)이 점점 퇴화(退化)하고 있는 현실이다. 예컨대 '구조조정'이라는 말에는, 그로 인해 실직하는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나 암시가 없다. 건조(乾燥)시킨 톱밥처럼 메마른 낱말인 '구조'만이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구조(회사)는 웃을 수 없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다. 울고 웃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에 속한 구성원인 개인들이다.
사이버 공간 속 담론(談論)의 현상도 '사람'에 대한 감각의 퇴화와 상관이 있다. 이 공간에서는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말한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는 못할 폭언과 비어(蜚語)도 가능해진다. 그 결과, 진짜로 사람 목숨을 앗아가는 수가 종종 있다.
<문학평론가>
래리 킹의 이야기도 이 '직접 만남'에 관한 것이었다. 셔츠 바람에 멜빵을 맨 늘 그 차림으로 CNN 토크 쇼를 25년간이나 이끈 노(老) 저널리스트의 위트와 품위에 반해 필자도 오래 전부터 이 노인의 팬이다. '서울디지털포럼'에 온 그는 말했다.
래리 킹이 말한 '사람'은, 스페인 철학자 우나무노가 그의 명저 '삶의 비극적 감정' 서두에서 말했던 그 '인간'이다. 우나무노는 말했다. "우리라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 따위의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를 지닌 그런 인간이다." 래리 킹이 말한 '사람'은 바로 그 '살과 뼈를 지닌' 인간이다.
필자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칼로 베면 피가 흐르고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그런 인간을 가리킨다.
우나무노나 래리 킹이 우려하는 것은, 사람의 사람에 대한 이 놀라운 감수성(感受性)이 점점 퇴화(退化)하고 있는 현실이다. 예컨대 '구조조정'이라는 말에는, 그로 인해 실직하는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나 암시가 없다. 건조(乾燥)시킨 톱밥처럼 메마른 낱말인 '구조'만이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구조(회사)는 웃을 수 없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다. 울고 웃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에 속한 구성원인 개인들이다.
사이버 공간 속 담론(談論)의 현상도 '사람'에 대한 감각의 퇴화와 상관이 있다. 이 공간에서는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말한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는 못할 폭언과 비어(蜚語)도 가능해진다. 그 결과, 진짜로 사람 목숨을 앗아가는 수가 종종 있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