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추억은 힘이 세다
입력 : 2011. 04. 20(수) 00:00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이해인 수녀의 신간 산문집이다. 아름다운 제목이다.

수녀는 암(癌)을 앓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태석 신부, 소설가 박완서, 법정 스님 등 앞서 세상 떠난 지인들에게 띄우는 편지글이 더욱 애틋하게 읽힌다.

필자는 이해인 수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한국기독교문학을 개괄(槪括)한 논문이었다. 이렇게 썼다. "그의 시는 격랑의 강가 바위틈에 핀 한 송이 들꽃과 같다. 존재론적으로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역사의 흐름은 그것의 존재를 아랑곳 않는다. 갈 길이 바쁜 역사는 그것을 곁눈질하고는 서둘러 비켜가고 말 것이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논지(論旨)다. 혹평(酷評)이었다.

역사를 앞으로 달려 나아가는 강물에 비유했다. 그때 필자는 젊었다. 젊은이는 미래를 척도로 현재를 평가한다. 그러나 필자와 같은 늙은이가 되면 미래는 과거만큼 의미가 없다. 그들은 추억의 힘으로 산다. 그들의 인생의 의미는 지나간 시간으로부터 온다.

이해인 수녀의 편지글들은 속삭이고 있다. "당신들을 사랑했다. 하늘에서 다시 만나자." 그들이 하늘에서의 재회를 기약할 수 있는 것도, 지상에서 나눴던 삶의 추억이 있어서다. 그러나 만일 사후세계가 없다면 이들의 만남의 기약은 어찌 되는가.

천주교 사도신경에 '모든 거룩한 이의 통공(通共)'이라는 교리가 나온다. 개신교에서는 그것을 '모든 믿는 이의 교제(交際)'로 이해한다. 교리적으로 따지면 다른 점이 있으나, 교의의 대강은 믿는 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 교통한다는 의미다.

누군가 사후세계를 믿느냐 물어오면 필자는 대답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모어와 마더 테레사와 나의 어머니가 믿었던 신앙이 오류(誤謬)라고 한다면, 나는 그들과 함께 오류의 공동체에 머물 용의가 있다고.

가족을 앞세워 보냈던 박완서 선생의 대답은 더욱 절절했다. 생전에 TV 인터뷰에서 선생은 말했다. "남편과 아들이 가 있는 곳이면 그곳이 무(無)의 어둠 속이라 해도 쑥 빠져들고 싶다."

추억은 죽음보다 힘이 세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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