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번역의 어려움
입력 : 2011. 04. 01(금) 00:00
허클베리 핀의 흑인 친구 짐은 심하게 사투리를 쓴다. 미주리 주(州) 흑인 사투리다. 민음사 문학전집의 역자는 그것을 우리 사투리로 옮겼다. 먹을거리가 산딸기뿐이라고 투덜대는 허크에게 짐은 말한다. "먹을 것이 그것밖에 없응께."

양복 입고 갓 쓴 꼴로 어색하다. 그래도 원칙에는 맞다. 번역은 낯선 언어를 낯익은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마이클 캘튼 교수는 퇴계(退溪) 숭배자다. 그는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영어로 옮겨-팔면 돈이 될 텐데도-인터넷에 올려 공짜로 퍼 가게 조치했다.

'성학십도'는 "無極而太極"이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된다. 민족문화추진회가 펴낸 국역 '퇴계집'은 다음과 같이 옮겼다. "무극이 태극이다." 거의 음역(音譯) 수준이다.

캘튼 교수는 태극을 'Supreme Ultimate(지고의 궁극적인 것)'로 옮겼다. '태극'과 '지고의 궁극적인 것' 중 어느 쪽이 쉬운가. 캘튼의 미국인 독자들이 우리보다 태극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지 모른다. 찝찝한 이야기다.

'太極'을 모르는 사람은 '태극'도 알 수 없다. 번역은 문자가 아니라 의미를 옮겨야 한다. 그러나 원칙이 그럴 뿐이다. 막상 옮기려면 고충이 첩첩이다.

송정희씨는 제주도에 하나 있는 영자지인 '제주 위클리'의 발행인이다. 송 씨 같은 영어 도사도 '4·3 사건'을 영어로 뭐라고 옮길지 고민이라고 했다.

'accident(사건)'로 직역하면 4·3이 우발적 사건-교통사고와 같은-으로 들릴 수 있다. 소설 '순이 삼촌'의 영역자는 'uprising(봉기)'으로 옮겼다. 저항의 뜻은 살렸으나 참상은 못 살린 번역이다. 미국인 4·3 연구가인 존 메릴이 옮긴 'rebellion(반역)'도 같은 문제를 안은 역어다. 'massacre(학살)'은 어떤가. 이 경우는 난점이 앞의 경우와 정반대다. 참상은 살렸지만 저항의 의미가 죽는다.

저항과 수난이 엉클어진 역사다. 4·3 역자들의 고충은 4·3 자체의 착잡한 성격에서 올 것이다. 그 사실이 또한 사람을 착잡하게 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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