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안팎은 없다
입력 : 2011. 03. 30(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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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앙숙(怏宿) 관계였다. 먹고 사는 산업도 서로 달랐다.
스파르타는 농업국가였다. 농사 짓는 사람은 오래 밖으로 나돌 수가 없다. 떠난 동안 농작물이 웃자라거나 말라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토지에 붙박아 살아가게 된다. 스파르타는 농촌의 그런 폐쇄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경우였다.
아테네는 항구도시다. 그래서 일찍부터 교역(交易)이 번성했다. 상인은 사람들을 만나서 흥정하는 것이 직업이다. 개방적이 될 수밖에 없다.
섬나라인 일본도 무역으로 먹고 산다. 그러나 일본은 전통적으로 농업국가다. 2차대전을 주도한 일본 육군 장교들도 대부분 농촌출신이었다. 기질적으로 그들은 아테네인보다 스파르타인에 가까웠다.
지금의 일본은 옛날의 일본이 아니다. 그러나 전통은 꼬리뼈처럼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외국인을 '가이진(外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외국인을 '외인'으로 부르는 것은 동어반복(同語反覆)처럼 들린다. 그러나 두 낱말의 바닥에 깔린 의미는 전혀 다르다. '가이진'의 칙칙한 의미를 필자는 우연히 알게 됐다.
신간인데, 나가하라 게이지 씨가 쓴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에 따르면, 9세기 이래 일본의 지배계급이 일본국의 안과 밖을 보는 고정관념이 있다. 안=신국(神國)=청정(淸淨), 밖=이토(異土)=부정(汚穢). 정리하자면, "그들에게 국경은 성스러운 영역인 일본을 부정한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는 벽으로 간주된다."
'외인'이라고 할 때의 '외'는 그런 의미다. 저자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귀축영미(鬼畜英美)' 구호도 같은 대외 인식에 닿아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쓰나미의 참상에 울고 있는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다. 세계가 눈물짓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일본인들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세계가 떨고 있다.
인간사는 100% 좋은 일도, 100% 나쁜 일도 없다. 훗날 역사는 이것 한 가지는 긍정적으로 기록할 것이다. 대재앙은 일본을 안과 밖으로 갈랐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됐다고.
<문학평론가>
스파르타는 농업국가였다. 농사 짓는 사람은 오래 밖으로 나돌 수가 없다. 떠난 동안 농작물이 웃자라거나 말라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토지에 붙박아 살아가게 된다. 스파르타는 농촌의 그런 폐쇄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경우였다.
섬나라인 일본도 무역으로 먹고 산다. 그러나 일본은 전통적으로 농업국가다. 2차대전을 주도한 일본 육군 장교들도 대부분 농촌출신이었다. 기질적으로 그들은 아테네인보다 스파르타인에 가까웠다.
지금의 일본은 옛날의 일본이 아니다. 그러나 전통은 꼬리뼈처럼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외국인을 '가이진(外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외국인을 '외인'으로 부르는 것은 동어반복(同語反覆)처럼 들린다. 그러나 두 낱말의 바닥에 깔린 의미는 전혀 다르다. '가이진'의 칙칙한 의미를 필자는 우연히 알게 됐다.
신간인데, 나가하라 게이지 씨가 쓴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에 따르면, 9세기 이래 일본의 지배계급이 일본국의 안과 밖을 보는 고정관념이 있다. 안=신국(神國)=청정(淸淨), 밖=이토(異土)=부정(汚穢). 정리하자면, "그들에게 국경은 성스러운 영역인 일본을 부정한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는 벽으로 간주된다."
'외인'이라고 할 때의 '외'는 그런 의미다. 저자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귀축영미(鬼畜英美)' 구호도 같은 대외 인식에 닿아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쓰나미의 참상에 울고 있는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다. 세계가 눈물짓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일본인들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세계가 떨고 있다.
인간사는 100% 좋은 일도, 100% 나쁜 일도 없다. 훗날 역사는 이것 한 가지는 긍정적으로 기록할 것이다. 대재앙은 일본을 안과 밖으로 갈랐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됐다고.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