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우리 시대의 바벨탑
입력 : 2011. 03. 25(금) 00:00
이미지는 어떤 사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가리켜 보여준다. 그래서 때로는 이미지 하나가 긴 설명서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지난 번 글에서 필자는 타이타닉 호를 빌려 썼다. 오늘 빌릴 이미지는 바벨탑이다. 타이타닉 호와 바벨탑은 모두 인간이 자초한 난파(難破)의 이미지다. 그러나 후자가 보다 더 근본적이다.

타이타닉 호는 고장난 문명의 이미지다. 바벨탑의 이미지는 문명 자체를 비판한다. 대략 다음과 같은 줄거리의 이야기다.

노아의 홍수(洪水)를 겪은 인간들은 다시 쓰나미가 닥쳐도 잠기지 않을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한다. 신은 그것을 하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는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되자 공동체는 갈등과 불화로 해체된다. 인간들은 각기 사방으로 흩어지고 탑은 무너져 내린다.

'신'을 '자연'으로 바꿔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또 하나의 교훈적 이미지를 얻게 된다. 후쿠시마 원전은 이를테면 우리 시대의 바벨탑인 것이다.

탑은 일종의 홍수 대비시설이었다. 바벨탑 이야기를 우리는 자연과 싸우는 인간들의 영웅담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후쿠시마의 비극이 무마(撫摩)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쓰느냐 전쟁을 위해 쓰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원자력 시대'의 바탕에 깔린 기술적 내지 도구주의적 사유(思惟) 자체다.

철학자에 의하면, 자연을 에너지와 원자재의 창고(倉庫) 쯤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가장 문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연을 닦달해 에너지를-그것도 최대한으로-뽑아낼 궁리만 한다. 그 결과 "자연 가운데서 가장 나약한 갈대"가 그 자연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다음의 결과도 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의 씨앗은 남아 있다. 인류는 바벨탑 이전에 소통하던 언어를 완전히 잃어 버린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웃 국민과도 애틋한 위로를 나눌 수가 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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