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불신 지옥' 유감
입력 : 2011. 03. 16(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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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목사가 말했다고 했다. "(일본 지진은)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착오(錯誤)가 있었던 모양이다. ㅈ목사를 인터뷰한 인터넷신문은 문장을 압축해 편집한 것이 오해를 불렀다고 해명하는 기사를 냈다. 아무렴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왜냐하면 문제의 발언은 성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장 45절)
타인의 불행에서 '불신 지옥'을 보는 사람은 가학적(加虐的)인 인간성의 소유자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성경은 말한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마태 7장 1절)
단테의 '신곡(神曲)' 지옥편은 그런 가학적 장면이 가득하다. 그런 지옥을 만든 창조주는 사랑의 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저명한 신학자인 한스 큉 신부는 그의 책 '믿나이다'에서 침통하게 자문한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그런 신을 믿을 수 있는가. 자신의 피조물에게 무자비한 고문(拷問)을 끝없이 가하는 신을."
자식을 죽이는 아비들도 있다. 그러나 자식을-그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불구덩이에 처넣어 끝없이 태우는 아비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이시겠는가.
그렇다 해도 지옥이라는 기독교의 전통적 관념을 일거(一擧)에 취소시킬만큼 필자는 무모하지 못하다. 필자가 성찰 끝에 얻은 생각은 이렇다.
지옥이라는 낱말이 실로 의미있게 발언되는 곳은 저주의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장면이다. "저는 지옥불에 던져져 마땅한 죄인이오나,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니 감사하나이다"하고 기도할 때, 지옥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신의 자비를 드러내는 계기로서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언급된다.
일본의 지진 참사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이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 신앙인이 할 일은, '불신 지옥'의 저주가 아니라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착오(錯誤)가 있었던 모양이다. ㅈ목사를 인터뷰한 인터넷신문은 문장을 압축해 편집한 것이 오해를 불렀다고 해명하는 기사를 냈다. 아무렴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왜냐하면 문제의 발언은 성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불신 지옥'을 보는 사람은 가학적(加虐的)인 인간성의 소유자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성경은 말한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마태 7장 1절)
단테의 '신곡(神曲)' 지옥편은 그런 가학적 장면이 가득하다. 그런 지옥을 만든 창조주는 사랑의 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저명한 신학자인 한스 큉 신부는 그의 책 '믿나이다'에서 침통하게 자문한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그런 신을 믿을 수 있는가. 자신의 피조물에게 무자비한 고문(拷問)을 끝없이 가하는 신을."
자식을 죽이는 아비들도 있다. 그러나 자식을-그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불구덩이에 처넣어 끝없이 태우는 아비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이시겠는가.
그렇다 해도 지옥이라는 기독교의 전통적 관념을 일거(一擧)에 취소시킬만큼 필자는 무모하지 못하다. 필자가 성찰 끝에 얻은 생각은 이렇다.
지옥이라는 낱말이 실로 의미있게 발언되는 곳은 저주의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장면이다. "저는 지옥불에 던져져 마땅한 죄인이오나,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니 감사하나이다"하고 기도할 때, 지옥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신의 자비를 드러내는 계기로서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언급된다.
일본의 지진 참사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이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 신앙인이 할 일은, '불신 지옥'의 저주가 아니라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