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정답이 두 개인 문제
입력 : 2011. 02. 11(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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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서양의 풍경이다. 왕의 행차 때는 동원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모여 들었다. 행차 자체도 볼거리였지만, 재수가 좋으면 행차의 주인이 던져주는 돈이나 빵이 생길 수 있었다. 왕이 그러는 것은 자선이 아니었다. 복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권력의 과시(誇示)에 지나지 않았다.
복지는 자선과도 다르다. 자선은 선물과 같다. 안 줘도 되지만 주는 일종의 잉여(剩餘) 행위다. 복지는 빚과 같다. 빚은 안 내켜도 갚아야 한다. 복지도 그렇다. 국가에게 국민복지는 일종의 부채(負債)다.
1601년 엘리자베스 구민법(救民法)이 만들어졌을 때다. 구민의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법으로 공표한 첫 케이스였다. 그 때도 영국은 신사의 나라였다. 정작 빈민들은 이 법을 반기지 않았다. 공짜는 체면을 구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랬다.
받는 입장에서야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많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다. 늘 모자라서 불만이다.
한 쪽은 무상복지를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이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이 논쟁의 요점을 500년 전에 이미 꿰어 본 사상가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펼치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중으로부터 통이 크다는 평판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낭비에 기울게 된다. 그리하여 군주는 자기의 전재산을 탕진(蕩盡)하게 된다. 그러고도 계속 평판을 유지하려면 무거운 세금으로 돈을 긁어 모으는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군주는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된다."
시사(時事)에 밝은 국민들은 인용부호 속의 문장이 퍽 낯이 익을 것이다. 민주당의 복지정책을 비판하는 정부·여당과 보수 언론의 논지는 마키아벨리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동의한다. 마키아벨리는 정답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답은 아니다. 공짜 복지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복지의 빈곤을 방치하거나 묵과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이럴 때 건전하고 합리적인 정신이 늘 선택하는 한 가지 길이 있다. 타협이다.
타협의 정신은 불가능한 목표를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며 포기하지도 않는다. <문학평론가>
1601년 엘리자베스 구민법(救民法)이 만들어졌을 때다. 구민의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법으로 공표한 첫 케이스였다. 그 때도 영국은 신사의 나라였다. 정작 빈민들은 이 법을 반기지 않았다. 공짜는 체면을 구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랬다.
받는 입장에서야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많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다. 늘 모자라서 불만이다.
한 쪽은 무상복지를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이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이 논쟁의 요점을 500년 전에 이미 꿰어 본 사상가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펼치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중으로부터 통이 크다는 평판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낭비에 기울게 된다. 그리하여 군주는 자기의 전재산을 탕진(蕩盡)하게 된다. 그러고도 계속 평판을 유지하려면 무거운 세금으로 돈을 긁어 모으는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군주는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된다."
시사(時事)에 밝은 국민들은 인용부호 속의 문장이 퍽 낯이 익을 것이다. 민주당의 복지정책을 비판하는 정부·여당과 보수 언론의 논지는 마키아벨리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동의한다. 마키아벨리는 정답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답은 아니다. 공짜 복지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복지의 빈곤을 방치하거나 묵과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이럴 때 건전하고 합리적인 정신이 늘 선택하는 한 가지 길이 있다. 타협이다.
타협의 정신은 불가능한 목표를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며 포기하지도 않는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