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미안타, 소(牛)야
입력 : 2011. 02. 09(수) 00:00
가가

농민이 죽었다. 소를 키우던 농민이었다. 키우던 소가 구제역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목숨처럼 아낀다'는 말이 그 농민에게는 그저 비유(比喩)가 아니었다. 그에게 소를 잃는 것은 목숨을 버릴 만큼 큰 상실이었다.
소는 가축이다. '가축'은 객관적이고 따라서 가치중립(價値中立)적인 낱말이다. 그러나 키우는 사람에게는 가축이 '가족'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가족을 가치중립적으로 대할 수가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냉정한 심성의 소유자일 것이다.
같은 소가 어떤 때는 가족이 되고, 어떤 때는 상품이 된다. 식품이 되기도 한다.
TV에서 티벳인들이 소를 도축(屠畜)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쓰러뜨린 소의 코에 기름을 부어 질식사시키는 특이한 도축방법이었다. 그 때 필자는 보았다. 소의 커다란 젖은 눈망울을.
소는 자기를 쓰러뜨리는 사람들을-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있는 필자를-겁에 질린 눈망울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 슬픈 눈망울이 자꾸만 기억에 살아나 그 뒤로 한동안 쇠고기를 먹지 못했다. 그러나 망각(忘却)은 참 편리한 장치다. 지금은 다시 잘 먹는다.
필자의 목을 잠기게 했던 소는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커다란 생명체였다. 그것이 다시 필자의 목젖을 감미롭게 애무(愛撫)하며 위장으로 흘러들어갈 때, 소는 어느새 식품이 돼 있다. 그런데 소는 소다. 이 소와 저 소가 다른 소가 아니다. 같은 소다. 인간은 이토록 모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런 모순을 견디며 사는 것이 삶이다. 인간으로 사는 한, 이 모순 상황을 피할 수가 없다.
조셉 캠벨의 책 '신화의 힘'에 소개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 원죄적 모순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냥에 나서기 전 들소에게 제사를 올렸다. 속죄(贖罪)의 제사였다. "우리는 살기 위해 그대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를 부디 용서해 다오."
미개인의 미신행위로 치부하지 않도록 하자. 지구 생태의 위기는, 이런 죄의식의 소멸과 그로 인한 과소비의 결과다. <문학평론가>
같은 소가 어떤 때는 가족이 되고, 어떤 때는 상품이 된다. 식품이 되기도 한다.
TV에서 티벳인들이 소를 도축(屠畜)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쓰러뜨린 소의 코에 기름을 부어 질식사시키는 특이한 도축방법이었다. 그 때 필자는 보았다. 소의 커다란 젖은 눈망울을.
소는 자기를 쓰러뜨리는 사람들을-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있는 필자를-겁에 질린 눈망울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 슬픈 눈망울이 자꾸만 기억에 살아나 그 뒤로 한동안 쇠고기를 먹지 못했다. 그러나 망각(忘却)은 참 편리한 장치다. 지금은 다시 잘 먹는다.
필자의 목을 잠기게 했던 소는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커다란 생명체였다. 그것이 다시 필자의 목젖을 감미롭게 애무(愛撫)하며 위장으로 흘러들어갈 때, 소는 어느새 식품이 돼 있다. 그런데 소는 소다. 이 소와 저 소가 다른 소가 아니다. 같은 소다. 인간은 이토록 모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런 모순을 견디며 사는 것이 삶이다. 인간으로 사는 한, 이 모순 상황을 피할 수가 없다.
조셉 캠벨의 책 '신화의 힘'에 소개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 원죄적 모순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냥에 나서기 전 들소에게 제사를 올렸다. 속죄(贖罪)의 제사였다. "우리는 살기 위해 그대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를 부디 용서해 다오."
미개인의 미신행위로 치부하지 않도록 하자. 지구 생태의 위기는, 이런 죄의식의 소멸과 그로 인한 과소비의 결과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