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설, 살, 샅
입력 : 2011. 02. 02(수) 00:00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할 때 선조들이 뇌리에 그렸던 것은 새 아침의 이미지였다. 서양인들이 그것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옮겨 지금까지도 쓰이는데, 오역(誤譯)이다.

선(鮮)은 새로운 것, 빛나는 것, 깨끗한 것, 선(善)한 것이다. 그리고 힘찬 것이다. 갓 잡아올린 생선이 팔딱이며 찬란한 빛을 사방으로 내뿜는 그런 역동성이 담긴 국호다. 신비스러우나 정체된 고요한 나라가 아니라 불끈 치솟는 동녘의 아침해와 같은 나라, 이것이 조선이 꿈꿨던 나라다.

우리말 '새해'의 '새'는 동녘을 뜻한다. 그래서 '샛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새'는 '사이'라는 뜻도 있다. 국어학자 정호완이 쓴 '우리말의 상상력'에 의하면, '설'도 '사이'에서 온 말이다. 묵은 해와 새해의 사이가 설이다.

그 저자에 의하면, '살(肉)'도 '사이'에서 왔다고 한다. 살은 뼈와 피부의 '사이'다. 사타구니의 '샅'도 어원이 같다. 다리와 다리의 '사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모두가 샅에서 나온 살들이다. 설날의 귀향은 이 살들이 자기가 태어난 샅으로 돌아가 보는 행사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주인공이 땅에 입맞추는 장면이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곳으로 꼽히는 장면이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한다.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그에게 '거룩한 창녀' 소냐가 말한다. "어서 가서 광장에 엎드려 당신이 더럽힌 땅에 입맞추세요. 그리고 절하며 큰소리로 외치세요. '나는 살인자'라고."

왜 땅에 속죄를 해야 하는가. 땅은 샅이기 때문이다. 소냐에 의하면, 땅은 인류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범죄는 땅에 죄를 짓는 것이다.

소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서도 저자는 성자(聖者) 조시마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땅에 엎드려 입맞추고 눈물로 대지를 적셔라. 그러면 네 눈물이 대지의 열매를 맺어줄 것이다."

흙을 밟지 않고 사는 도시인은 입맞출 땅, 눈물로 적실 대지를 잃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귀향은, 황무지가 된 영혼들이 영성(靈性)을 되찾아 떠나는 순례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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