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위기의 제주어
입력 : 2011. 01. 21(금) 00:00
제주어(語)가 유네스코 지정 '소멸 위기의 언어'로 등록됐다. 위기의 정도는 1에서 5까지로 나뉘는데, 제주어는 4단계로 분류됐다. 소멸 직전의 단계다.

다들 그러니까 필자도 '제주어'로 썼지만, 안타깝다. 어째서 '제주방언'이라고 당당히 못 쓰는가.

경험자들은 씁쓰레 기억할 것이다. 상경한 '제주촌놈'들이 명동 바닥을 휘저으며 부러 제주 사투리로 왜자기던 시절을. 필자도 그랬던 적이 있어 하는 이야기다. 서울의 복판에서 '촌놈'을 과시(誇示)하는 것은 실은 소외감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방신문'이라고 했다. 요즘은 '지역신문'이라고 한다. '지방'을 굳이 '지역'으로 고쳐 쓰는 것도 소외감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은 지방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예컨대 '압구정 지역'은 가능하지만, '압구정 지방'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지방'이 갖는 주변(周邊)이라는 의미가, 서울에서도 땅값이 가장 비싼 압구정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이라고 불러서 압구정으로 격상(格上)된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오히려 '지역'은, 중앙의 대척어로서 '지방'이 갖는 특성과 그로 인한 긴장·역동·창조적인 성격을 희석(稀釋) 내지 중화(中和)시켜 버리게 된다.

같은 이유로 필자는 '제주어'보다 '제주방언'을 선호한다. '지방'을 '지역'으로, '제주방언'을 '제주어'로 바꿔 부르는 데는 주류의 일원으로 행세하고 싶은 선망(羨望)이 깔려 있다.

그것은 흑인이 백인을 선망한 나머지 검은 피부를 표백(漂白)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그 결과 그들이 더 당당해지는가. 아니다. 오히려 의식 바닥에 깔린 칙칙한 열등감만 들키게 될 뿐이다.

지방은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의 샘이다. 발터 벤야민의 멋진 말이 있다. "역사의 결정적 일격은 항상 왼손으로 날린 주먹에서 비롯된다." 이 천재 비평가에 의하면, 역사의 창조는 다수자가 아니라 소수자,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 중앙이 아니라 지방에 의해 이뤄진다.

말은 정신이다. 정신이 죽으면 말도 죽는다. 지방어를 살리려면 지방정신이 살아나야 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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