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스파르타냐 아테네냐
입력 : 2011. 01. 07(금) 00:00
영화 '300'에서 숫자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대를 상징한다. 그들은 단 300명으로 100만의 페르시아군과 싸워 전원이 전사했다.

과연 스파르타답다. 러셀이 말한대로다. "스파르타에서 시민이 하는 일은 전쟁뿐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을 위해 단련됐다. 병약(病弱)한 아이는 버려져 죽게 놔 뒀다."

남녀 불문 전쟁 준비가 삶의 전부였다. 그럼 소는 누가 키웠나. 생산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일이 늘 그렇듯, 생산성은 낮고 불만은 컸다. 일찍이 스파르타에 비밀경찰이 창설됐던 이유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한다. 그러나 단서(但書)를 달고서 반복한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유명한 논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루메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역사는 다시 돌아온다.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으로."

시간이 남는 사람이 스파르타와 북한의 대조표를 만들어 보면, 역사가 '희극적으로' 반복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스파르타는 군사강국-북한의 용어로는 '강성대국'-이 되는 데 온 국력을 쏟았다. 그 결과 생산성은 떨어지고 사회적 불만이 커져 강압통치를 해야 했다. 강압통치를 하려면 국민이 바깥세상을 몰라야 한다. 그래서 스파르타에서는 외국여행이 금지됐다. 입국한 외국인도 곧 떠나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교역(交易)도 이뤄지기 힘들다. 6세기 반 경부터는 스파르타는 외국 수공업품의 수입을 금지하고 자급자족의 길을 간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의 구호 '우리 식으로'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스파르타와 라이벌 관계였던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자 함대를 상선(商船)으로 개조해 본격적인 해외 장삿길에 나선다. 그 결과 경제만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왕래가 잦아지자 새로운 경험과 지식이 쏟아져 들어와 과학과 철학이 꽃피었다.

스파르타의 길과 아테네의 길은 그 결과가 이렇듯 달랐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가 37배 가량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역액은 남한이 북한의 202배나 많았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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