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제주냐 탐라냐는 문제
입력 : 2011. 11. 11(금) 00:00
동북아시아를 영어로 'far east'라고 한다. '먼 동쪽'이다. 그것을 한자말로 '극동(極東)'으로 옮겼다. 어디에 서서 바라본 '극동'인가. 유럽에서 바라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18세기 이래 유럽인들은 아시아 대륙을 극동·중동·근동으로 나눠 불렀다. 어디까지나 서양중심이다. 우리나라에서 바라보면 유럽은 '극서(極西)'가 돼야 한다.

인류학자 전경수 교수(서울대)에 의하면, '제주'는 물 건널 濟, 땅이름 州, 즉 '물 건너 있는 땅'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어디에 서서 바라본 이름인가는 물어보나 마나다.

딸자식을 별나게 아끼는 아버지를 '딸바보'라고 부른다. 전 교수는 소문난 '제주바보'다. 그가 '제주'라는 명칭에 시비를 거는 것도 지극한 제주 사랑의 발로(發露)다. 이 점은 추호(秋毫)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제주'라는 이름의 밑바닥에는 점령지 내지 식민지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탐라'가 '제주'로 바뀜으로써 박탈(剝奪)당한 탐라인의 아이덴티티가 회복돼야 한다(한라일보 7일자 4면).

'극동' 같으면야 쉽다. 극동방송, 극동대학 등 그 이름을 쓰는 몇몇 유력기관을 설득해서-안 들으면 여론을 동원해 윽박아서라도-개명토록 하면 된다. 그러나 '제주'를 '탐라'로 바꾸는 것은 만만치 않다. 들어갈 돈만 셈해도 천문학적 액수가 될 것이다.

그래도 꼭 해야 할 일이면 해야 한다. 그런데 필자가 아직 잘 모르겠는 것은 탐라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의 실체다.

미국의 네이티브 아메리칸(소위 인디언), 오키나와의 오키나와족, 북해도의 아이누족, 타이완의 타이완족 등의 정체성 논의는 현재형일 수가 있다. 그 정체성의 실체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체성을 논할 때의 실체는 누구인가. 고, 량, 부씨가 그들이라면, '탐라'에서 살게 될 나머지 성씨가 겪을 정체성의 혼미(昏迷)는 어찌 되는가.

반박글이 아니다. 논의를 진척시켜 보자는 취지에서 하는 이야기다. <문학평론가>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298 왼쪽숫자 입력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송상일의 세상읽기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