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일의 세상읽기]사라의 열쇠
입력 : 2011. 11. 09(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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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난다. 시험 전날 밤을 세워 무협지를 읽었던 일.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그러나 읽다 중단한 사건의 그 다음이 궁금해 결국 다 읽고만다. 다음날의 결과는 비참하나, 시간이 흘러 지금은 유쾌한 추억이 됐다.
'사라의 열쇠'를 그 비슷한 상황에서 읽었다. 선금(先金)을 끌어 쓴 원고의 마감일에 쫓기며, 그런데도 손에서 놓지를 못해 결국 다 읽고만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소설이다.
소설은, 1942년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1만명 이상의 유태계 프랑스인이 프랑스 경찰-독일군이 아니고-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을 다뤘다. 그것을 제주 출신의 번역가 이은선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역자의 말'은 이 소설을 남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올레 1코스 종착점은 광치기 해안이다. 지금은 그 아름다운 풍경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해안이지만, 4·3사건 당시에는 떠내려온 시체로 그 일대 바닷물이 핏빛이었다고 한다. 같은 동포끼리 죽이고 죽은 사건이라 더욱 가슴 아프다. 프랑스의 그 사건처럼."
줄거리 소개는 않겠다. 추리소설의 범인을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읽는 즐거움을 아주 김새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의 곳곳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예컨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아내를 남편이 '묻어 두자'며 말리는 장면에서다.
"과거의 일이잖아. (중략) 진실을 폭로한다! 우리한테 창피를 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그것은 4·3과 관련해서 우리가 이따금씩 듣게 되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감(共感)과 동정(同情)이 없으면 역사를 쓸 수도, 바로 볼 수도 없다.
지금은 그 뜻이 변질돼 쓰이지만, 공감과 동정의 한자말은 '같이 느낀다'는 의미다. 그것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같이 느끼는' 능력이다. 불교에서는 '비(悲)'라고 한다. '자비'의 '비' 그것이다.
'사라의 열쇠'에서 필자가 느꼈던 것도 그 '비'의 경험이었다.
<문학평론가>
'사라의 열쇠'를 그 비슷한 상황에서 읽었다. 선금(先金)을 끌어 쓴 원고의 마감일에 쫓기며, 그런데도 손에서 놓지를 못해 결국 다 읽고만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소설이다.
"올레 1코스 종착점은 광치기 해안이다. 지금은 그 아름다운 풍경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해안이지만, 4·3사건 당시에는 떠내려온 시체로 그 일대 바닷물이 핏빛이었다고 한다. 같은 동포끼리 죽이고 죽은 사건이라 더욱 가슴 아프다. 프랑스의 그 사건처럼."
줄거리 소개는 않겠다. 추리소설의 범인을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읽는 즐거움을 아주 김새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의 곳곳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예컨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아내를 남편이 '묻어 두자'며 말리는 장면에서다.
"과거의 일이잖아. (중략) 진실을 폭로한다! 우리한테 창피를 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그것은 4·3과 관련해서 우리가 이따금씩 듣게 되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감(共感)과 동정(同情)이 없으면 역사를 쓸 수도, 바로 볼 수도 없다.
지금은 그 뜻이 변질돼 쓰이지만, 공감과 동정의 한자말은 '같이 느낀다'는 의미다. 그것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같이 느끼는' 능력이다. 불교에서는 '비(悲)'라고 한다. '자비'의 '비' 그것이다.
'사라의 열쇠'에서 필자가 느꼈던 것도 그 '비'의 경험이었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