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성의 한라시론] 1374년 9월, 목호의 난과 탐라 사람들
입력 : 2025. 09. 11(목) 01:00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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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1374년 9월 탐라는 '목호의 난' 한복판에 있었다. 목호의 난은 제주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된 시절, 탐라는 1275년 탐라총관부 설치로 원의 직할령이 되는데 몽골은 탐라에서 군마를 양성하고자 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목호(牧胡)를 파견한다. 목호는 1400명이 넘었고 약 100년간 탐라에 정착하며 결혼 등으로 토착화된다.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낸 명나라는 '북원' 공격에 쓸 군마 2000필을 바치라고 고려를 압박한다. 고려는 이를 수용하나 목호들은 "원 황제의 목장에서 키운 말을 적국인 명나라에 넘길 순 없다"며 반발한다. 1374년, 공민왕은 배 314척에 최영 장군이 이끄는 2만5600여 명의 대군을 보내 탐라의 목호들을 정벌하게 한다.
목호의 난 당시, 고려와 목호 중에서 고려를 '선택 못한' 탐라 사람들이 많았을 터다. 그런데 고려 말대로 그들을 '오랑캐'라고 할 수 있을까?
1105년에야 탐라는 고려에 편입되었다. 탐라민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니기엔 고려가 탐라에 해준 게 너무 없었다. '과한 공물과 노역 부과'로 당시 탐라엔 민란도 많고 고려에 대한 민심도 안 좋았다. 고려 공민왕이 내건 '반원'이나 목호들이 내건 '친원'이니 하는 건 탐라민 입장에선 하등 와닿지 않는 추상적인 일종의 '이념'일 뿐이다. 해방정국에서 4·3을 놓고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간 이념 대립에서 제주민이 부당하게 피해받은 것과 유사하다. 4·3 때 고압적인 '파견' 관료와 경찰과 비슷하게, 당시에도 '파견' 지방관에 대한 정서적 괴리와 갈등이 컸음은 물론이다.
고려군은 한 달이 안 되는 기간에 목호 일당을 일망타진한다. 목호가 숨었다고 의심되는 마을은 불타고, 목호와 같은 무리로 의심받은 탐라민은 가차 없이 처형된다. 목호의 난을 진압한 이후 이듬해까지 잔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몽골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남자, 노약자든 여인이든 의심되기만 하면 다 소탕 대상이 되는데 이때 희생된 자가 당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대목은 4·3에서 무장대를 토벌한다고 벌인 '중산간 마을 초토화작전'을 연상케 한다.
'목호의 난' 진압의 끔찍함에 대해, 제주 지방관을 지낸 하담은 "칼과 방패가 바다를 메웠고 간과 뇌가 땅을 덮었으니 목이 멘다."라고 표현하였다. '목호들만 딱 선별하여 제거'하는 게 애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고려 국익'에 맞지 않는 탐라민은 목호와 똑같이 '오랑캐'로 제거 대상이 될 뿐이었다. '오랑캐'라는 딱지는 해방 정국에서 4·3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빨갱이' 색출을 떠올리게 한다.
1374년 9월 탐라의 비극은 4·3의 비극과 다를 바 없다. 651년 전 탐라에 살았던 이름 없이 사라진 무수한 '개똥 어멍' '쇠돌 아방'은 죄가 없다. 이게 목호의 난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다. <김용성 시인·번역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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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된 시절, 탐라는 1275년 탐라총관부 설치로 원의 직할령이 되는데 몽골은 탐라에서 군마를 양성하고자 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목호(牧胡)를 파견한다. 목호는 1400명이 넘었고 약 100년간 탐라에 정착하며 결혼 등으로 토착화된다.
목호의 난 당시, 고려와 목호 중에서 고려를 '선택 못한' 탐라 사람들이 많았을 터다. 그런데 고려 말대로 그들을 '오랑캐'라고 할 수 있을까?
1105년에야 탐라는 고려에 편입되었다. 탐라민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니기엔 고려가 탐라에 해준 게 너무 없었다. '과한 공물과 노역 부과'로 당시 탐라엔 민란도 많고 고려에 대한 민심도 안 좋았다. 고려 공민왕이 내건 '반원'이나 목호들이 내건 '친원'이니 하는 건 탐라민 입장에선 하등 와닿지 않는 추상적인 일종의 '이념'일 뿐이다. 해방정국에서 4·3을 놓고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간 이념 대립에서 제주민이 부당하게 피해받은 것과 유사하다. 4·3 때 고압적인 '파견' 관료와 경찰과 비슷하게, 당시에도 '파견' 지방관에 대한 정서적 괴리와 갈등이 컸음은 물론이다.
고려군은 한 달이 안 되는 기간에 목호 일당을 일망타진한다. 목호가 숨었다고 의심되는 마을은 불타고, 목호와 같은 무리로 의심받은 탐라민은 가차 없이 처형된다. 목호의 난을 진압한 이후 이듬해까지 잔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몽골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남자, 노약자든 여인이든 의심되기만 하면 다 소탕 대상이 되는데 이때 희생된 자가 당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대목은 4·3에서 무장대를 토벌한다고 벌인 '중산간 마을 초토화작전'을 연상케 한다.
'목호의 난' 진압의 끔찍함에 대해, 제주 지방관을 지낸 하담은 "칼과 방패가 바다를 메웠고 간과 뇌가 땅을 덮었으니 목이 멘다."라고 표현하였다. '목호들만 딱 선별하여 제거'하는 게 애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고려 국익'에 맞지 않는 탐라민은 목호와 똑같이 '오랑캐'로 제거 대상이 될 뿐이었다. '오랑캐'라는 딱지는 해방 정국에서 4·3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빨갱이' 색출을 떠올리게 한다.
1374년 9월 탐라의 비극은 4·3의 비극과 다를 바 없다. 651년 전 탐라에 살았던 이름 없이 사라진 무수한 '개똥 어멍' '쇠돌 아방'은 죄가 없다. 이게 목호의 난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다. <김용성 시인·번역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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