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패배·어리석음으로 깨달은 삶의 가치들
입력 : 2025. 09. 12(금) 03:00
박소정 기자 cosorong@ihalla.com
정호승의 『편의점에서 잠깐』
[한라일보] "지난번 '슬픔이 택배로 왔다' 출간 이후 더이상 시를 못 쓰게 될 줄 알았다. 50여년 동안이나 시를 써내 시의 샘이 말라버렸다고 여겼다. 누가 그 샘을 파묵어버린 게 아니라 아예 수원지가 고갈되었다고 여겼다."

정호승 시인이 이같이 고백했다. 올해로 등단한 지 52년이 된 그에게도 절망의 순간이 왔다. 한동안 시의 샘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는 시인은 "그러나 사람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물과 밥을 먹어야 하듯 시인도 죽지 않으려면 시를 생각하고 써야 했다"며 "말라버린 시의 샘에 물이 조금식 고이기 시작"한 그때의 마음을 담았다.

정호승의 열다섯 번째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나왔다. 반 세기 동안 시를 써온 시인도 '시인의 말'을 통해 "특별히 이번 시집 출간의 기쁨이 크다"며 그 의미를 더한다.

시인이 3년 만에 펴낸 시집은 총 5부로 구성돼 표제작을 포함해 125편의 시가 실렸다. 이 중 스물다섯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발표된 시들이다. 그동안 일상적이고 익숙한 언어로 울림을 주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이를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들을 서정 언어로 표현하고, 패배와 어리석음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한 시들을 담아냈다.

"나는 패배가 고맙다 /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살아남기 위해 /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 나는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시 '패배에 대하여' 중)

"사람들이 나를 어리석다고 말할 때마다 / 나는 생각한다 / 어리석기 때문에 현명하다고 / 어리석음은 나를 현명하게 한다고"(시 '어리석음에 대하여' 중)

시인은 패배와 실패를 통해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어리석음이야 말로 진정한 현명함이라고 노래한다. 또 "이별을 경험해보지 않은 자는 사랑하지 못한다(시 '추락' 중)", "물은 엎질러졌을 때 가장 깨끗하고 맛있다(시 '엎질러진 물' 중)", "사람은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 가장 아름답다(시 '내리막길' 중)" 등 시집 곳곳에 담긴 잠언들을 통해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삶에 위로를 던진다.

해설을 쓴 오연경 평론가는 "시집을 펼치면 우리에게 먼저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차분한 관조와 사유의 목소리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담담한 어조에는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 사랑과 고통의 변증법을 노래해 온 험난한 시간이 무르익어 있다"며 "세상의 질서와 논리를 뒤집어 역설적 가치를 깨닫게 하는 말들은 넘어지고 당하고 망가지며 살아남은 우리에게 선물 같은 위로를 전한다"고 설명했다. 창비. 1만3000원.

박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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