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세화, 그곳엔
입력 : 2023. 04. 24(월) 16:32수정 : 2023. 04. 24(월)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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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에서 삼십 킬로미터 남짓하다.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 세화를 만나게 된다. 읍면 단위 소도시여서인지 처음엔 그저 그래 보였다.
마을 중간 지점,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액厄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처럼 형상 또한 늠름하다. 늦추위를 견딘 후 오월에는 진초록의 내음뿐만 아니라, 한여름이 되면 시원한 그늘까지 만들어주겠지. 마치 본디 자신의 역할인 것처럼.
세화의 옛 이름은 '가는곶'으로 '가늘게 뻗은 덤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쩌면 옛 제주에는 덤불 아닌 곳은 없지 않았을까. 차 없던 시절, 제주시에 다녀오려면 밤낮으로 하루를 쉬지 않고 걸었단다. 덤불을 헤치며 걸었을 테니 아마 세화, 그곳엔 덤불이 무성하지 않았던 것일까. 흙보다 모래가 많아 농사가 잘되지 않는 곳이었다 하니 덤불도 다른 곳에 비해 그 세勢가 약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는곶'이라 불리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이것은 옛이야기일 뿐이다. 요즘은 세화가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오일장 등 지역의 중심이었던 마을이 나이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와하며 477명의 주민이 뜻을 모아 마을 살리기에 나선 덕이 크다. '세화마을협동조합' 설립으로 시동을 걸어 마침내 세화 주민들의 행복 텃밭인 '질그랭이거점센터'라는 명소를 탄생시켰다. 이삼 층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웬만한 사무실 뺨치는 멋진 공유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그곳에서 주말 한나절,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고즈넉함, 넉넉함, 따스함, 부드러움, 아마 그곳에서 나의 시간은 그러하지 않았나 싶다.
큰 양푼이 넘치도록 주인장 손이 컸던 김치찌개, 매콤해서 중독되는 하얀 국물 짬뽕, 고등어구이를 곁들인 집밥 정식, 치즈가 줄줄 흘러내리는 돈가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빵 굽는 가게, 온갖 것을 다 파는 오일장을 하루하루 탐방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꼭 한 번 들러 봐야지, 할 만큼 마음을 쏙 훔친다.
하마터면 중요한 곳을 놓칠 뻔했다. 매일 이백 명 이상이 찾는 세화 점심 맛집 '세화중학교 급식실'이다. 입학식 때 '세화맛집'이라고 소개할 만큼 단번에 모두의 입맛을 확 사로잡았다. 신선한 재료도 재료지만 양념과 맛이 어머니 손맛처럼 으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건 뭐니 뭐니 해도 세화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학교가 근무지인지라 날마다 많은 아이가 들고난다. 구김살 없는 얼굴에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이다. 수십 년을 다닌 직장이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내가 만난 세화중학교는 매 순간순간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교실, 뛰노는 운동장에서의 몸짓은 막 터지는 꽃망울처럼 강한 힘이 넘친다. 학교 본래의 모습이자 지향해야 할 미래 학교의 모습 아닐까. 이제 갓 꽃을 피운 노랑싸리처럼 싱싱하게 햇살을 만끽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자지러진다. 선생님이 너무 좋다며 방학에도 등교하고 싶다는 아이, 친구들과 함께해서 그냥 신난다는 아이, 모두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간 속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다. 하루하루 부쩍 성장하는 모습에 그들 스스로 대견해하는 눈치다.
등교 시간엔 수많은 차량과 보도 위의 아이들을 위해 교통을 지휘하는 안전지킴이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학교 근처를 이동하는 학부모와 지역주민의 차량을 향해 예(禮)를 갖추어 인사를 건넨다. 비가 오거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한결같다. 예비군 중대장직을 마친 후, 어느덧 십 년 가까이 아이들을 위한 교통안전 봉사를 하고 있다. 내일모레가 팔순인데도 정정하게 소임을 다하는 얼굴엔 늘 웃음이 넘친다. 오래도록 마을을 지키는 팽나무와 다를 바 없어, 실존의 까닭을 자신에게 되묻게 한다.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오늘은 또 어떤 들꽃 향일까, 잔뜩 기대한 만큼 발걸음은 빨라진다. 도서관 배움 지원 선생님이 출근길에 피어 있는 꽃을 두어 송이 꺾어오는 모양이다. 작은 들꽃으로도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아침마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인가.
한 여선생님은 잡초 가득한 학교 자투리 공간을 정리하여 봄꽃으로 채운다. 키 작은 꽃, 키 큰 꽃, 노란 꽃, 빨간 꽃을 고루고루 챙겨가며 잰걸음으로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인다. 꽃보다 더 싱그럽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다른 한편에선 건장한 남선생님 네댓이 구슬땀을 흘리며 서툰 삽질을 시작한다. 굳었던 발밑의 흙이 순식간에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낸다. 비 온 뒤에 아이들과 수박, 호박, 가지 따위를 심을 예정이란다. 열매가 실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 따윈 없는 듯하다. 물을 주고 꽃을 피우며, 열매 맺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겐 또 하나의 놀라운 선물 아니겠는가.
세화, 그곳엔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큰 복이 내린 것만은 틀림없다. 이토록 작은 것 하나하나에 열중하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하는 세화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복된 시간일 것이다. 꽃밭, 텃밭 기초작업을 마무리한 선생님들이 퇴근 시간에 맞춰 하나둘 학교를 나선다. 수문장 돌하르방이 집으로 향하는 긴 그림자들을 향해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며, 푸근한 미소로 배웅한다.
세화에서 만나는 아이들, 선생님, 지역민, 돌하르방의 영혼이 지역 특산품인 당근 주스처럼 투명하게 각인되는 하루다. 아름답고 진한 일상의 여운을 곱게 담아두고 싶다. 지역 특산품으로 손꼽히는 색감 좋은 당근 주스처럼 주황빛으로 오래오래 남도록.
세화 그곳엔, 아직 다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오늘도 꿈틀대고 있다. <오민숙 세화중학교 교감·수필가>
마을 중간 지점,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액厄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처럼 형상 또한 늠름하다. 늦추위를 견딘 후 오월에는 진초록의 내음뿐만 아니라, 한여름이 되면 시원한 그늘까지 만들어주겠지. 마치 본디 자신의 역할인 것처럼.
이것은 옛이야기일 뿐이다. 요즘은 세화가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오일장 등 지역의 중심이었던 마을이 나이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와하며 477명의 주민이 뜻을 모아 마을 살리기에 나선 덕이 크다. '세화마을협동조합' 설립으로 시동을 걸어 마침내 세화 주민들의 행복 텃밭인 '질그랭이거점센터'라는 명소를 탄생시켰다. 이삼 층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웬만한 사무실 뺨치는 멋진 공유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그곳에서 주말 한나절,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고즈넉함, 넉넉함, 따스함, 부드러움, 아마 그곳에서 나의 시간은 그러하지 않았나 싶다.
큰 양푼이 넘치도록 주인장 손이 컸던 김치찌개, 매콤해서 중독되는 하얀 국물 짬뽕, 고등어구이를 곁들인 집밥 정식, 치즈가 줄줄 흘러내리는 돈가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빵 굽는 가게, 온갖 것을 다 파는 오일장을 하루하루 탐방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꼭 한 번 들러 봐야지, 할 만큼 마음을 쏙 훔친다.
하마터면 중요한 곳을 놓칠 뻔했다. 매일 이백 명 이상이 찾는 세화 점심 맛집 '세화중학교 급식실'이다. 입학식 때 '세화맛집'이라고 소개할 만큼 단번에 모두의 입맛을 확 사로잡았다. 신선한 재료도 재료지만 양념과 맛이 어머니 손맛처럼 으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건 뭐니 뭐니 해도 세화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학교가 근무지인지라 날마다 많은 아이가 들고난다. 구김살 없는 얼굴에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이다. 수십 년을 다닌 직장이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내가 만난 세화중학교는 매 순간순간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교실, 뛰노는 운동장에서의 몸짓은 막 터지는 꽃망울처럼 강한 힘이 넘친다. 학교 본래의 모습이자 지향해야 할 미래 학교의 모습 아닐까. 이제 갓 꽃을 피운 노랑싸리처럼 싱싱하게 햇살을 만끽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자지러진다. 선생님이 너무 좋다며 방학에도 등교하고 싶다는 아이, 친구들과 함께해서 그냥 신난다는 아이, 모두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간 속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다. 하루하루 부쩍 성장하는 모습에 그들 스스로 대견해하는 눈치다.
등교 시간엔 수많은 차량과 보도 위의 아이들을 위해 교통을 지휘하는 안전지킴이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학교 근처를 이동하는 학부모와 지역주민의 차량을 향해 예(禮)를 갖추어 인사를 건넨다. 비가 오거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한결같다. 예비군 중대장직을 마친 후, 어느덧 십 년 가까이 아이들을 위한 교통안전 봉사를 하고 있다. 내일모레가 팔순인데도 정정하게 소임을 다하는 얼굴엔 늘 웃음이 넘친다. 오래도록 마을을 지키는 팽나무와 다를 바 없어, 실존의 까닭을 자신에게 되묻게 한다.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오늘은 또 어떤 들꽃 향일까, 잔뜩 기대한 만큼 발걸음은 빨라진다. 도서관 배움 지원 선생님이 출근길에 피어 있는 꽃을 두어 송이 꺾어오는 모양이다. 작은 들꽃으로도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아침마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인가.
한 여선생님은 잡초 가득한 학교 자투리 공간을 정리하여 봄꽃으로 채운다. 키 작은 꽃, 키 큰 꽃, 노란 꽃, 빨간 꽃을 고루고루 챙겨가며 잰걸음으로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인다. 꽃보다 더 싱그럽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다른 한편에선 건장한 남선생님 네댓이 구슬땀을 흘리며 서툰 삽질을 시작한다. 굳었던 발밑의 흙이 순식간에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낸다. 비 온 뒤에 아이들과 수박, 호박, 가지 따위를 심을 예정이란다. 열매가 실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 따윈 없는 듯하다. 물을 주고 꽃을 피우며, 열매 맺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겐 또 하나의 놀라운 선물 아니겠는가.
세화, 그곳엔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큰 복이 내린 것만은 틀림없다. 이토록 작은 것 하나하나에 열중하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하는 세화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복된 시간일 것이다. 꽃밭, 텃밭 기초작업을 마무리한 선생님들이 퇴근 시간에 맞춰 하나둘 학교를 나선다. 수문장 돌하르방이 집으로 향하는 긴 그림자들을 향해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며, 푸근한 미소로 배웅한다.
세화에서 만나는 아이들, 선생님, 지역민, 돌하르방의 영혼이 지역 특산품인 당근 주스처럼 투명하게 각인되는 하루다. 아름답고 진한 일상의 여운을 곱게 담아두고 싶다. 지역 특산품으로 손꼽히는 색감 좋은 당근 주스처럼 주황빛으로 오래오래 남도록.
세화 그곳엔, 아직 다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오늘도 꿈틀대고 있다. <오민숙 세화중학교 교감·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