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주인의 건강보고서 Ⅷ 건강다이어리] (167) 척수증
입력 : 2026. 06. 12(금) 02:00
구준회 hl@ihalla.com
손발 둔해지고 걸음걸이 꼬인다면
단순 허리 통증 아닌 ‘척수’의 경고
"좀 쉬면 낫겠지" 방치하지 말고
목·등까지 전척추 살펴 마비 예방을
제때 의심·정확 진단하는 게 중요




[한라일보]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면 대부분은 허리디스크나 협착증을 먼저 떠올린다. 실제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도 "허리가 안 좋아서 다리가 이렇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말 허리만 보고 지나가도 되는 걸까. 겉으로는 흔한 허리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척수가 눌리며 서서히 마비로 향하는 병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척수증이다.

(왼쪽)흉추부위 척수종양으로 척수가 압박된 MRI, (오른쪽)경추부위 후종인대골화증으로 척수가 압박된 MRI. 제주대학교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허리병'이 아니었던 환자=얼마 전 응급실에서 한 환자를 만났다. 1년 넘게 허리 통증과 다리 저림으로 고생해 왔고, 다른 병원에서 허리 MRI를 찍어 "크게 문제 될 만한 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하지만 증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걷는 모습이 달라졌다. 다리가 끌리고, 균형이 흔들리고, 본인도 "왜 이렇게 자꾸 걷기가 힘들어지지" 하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쯤 되면 많은 사람은 허리병이 더 심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신경학적 진찰을 해보니 단순한 허리질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 소견이 보였다. 결국 전척추 MRI를 추가로 촬영했고, 그제야 척수를 누르고 있던 척수종양이 발견됐다. 허리 문제라고 생각하며 보낸 시간이 사실은 척수 손상이 진행되던 시간이었던 셈이다. 이후 환자는 신속히 수술을 받았고, 척수종양을 잘 제거한 뒤 현재는 증상이 호전돼 잘 지내고 있다.



▶왜 척수증은 자꾸 허리병으로 오해될까=척수증은 척수가 눌려 생기는 병이다. 척수는 뇌에서 내려와 팔과 다리의 움직임, 감각, 균형을 조절하는 핵심 신경 통로다. 이 부위에 문제가 생기면 단순히 "좀 저리다"로 끝나지 않는다. 손이 둔해지고, 젓가락질이 서툴러지고, 단추를 채우기 어려워질 수 있다. 다리 쪽으로는 발이 자꾸 걸리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중심을 잡기 힘들어지며, 걸음걸이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대개 아주 천천히 온다는 점이다. 손 저림은 손목터널증후군처럼 느껴지고, 다리 저림이나 보행 불편은 허리 협착증으로 오해되기 쉽다. 환자도 "나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 쉽고, 진료 현장에서도 흔한 질환부터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영국 1차 진료 관련 연구에서는 척수증 진단이 평균 2년 지연될 수 있다고 했고, 2025년 체계적 문헌고찰에서는 증상 시작 후 진단 또는 수술 전 평가까지 평균 15개월, '척수증다운 증상'이 시작된 뒤 수술까지도 평균 10.7개월이 걸렸다고 보고했다.

척수증을 의심할 수 있는 주요증상


▶"조금 더 지켜보자"가 위험할 수 있는 이유=모든 척추질환이 곧바로 수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허리디스크나 퇴행성 통증은 약물치료, 물리치료, 주사치료로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척수증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척수가 눌리며 신경 기능이 떨어지고 있다면, 약이나 물리치료는 불편함을 잠시 줄여줄 수는 있어도 눌린 척수 자체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미국가정의학회 리뷰에서도 경증에서 중등도 척수증 환자 가운데 20~60%는 보존적 치료를 받는 동안 3~6년 안에 신경학적으로 악화돼 결국 수술이 필요해질 수 있다고 정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국제 가이드라인에서 인용된 연구에 따르면 증상 기간이 길어질수록 좋은 수술 결과를 얻을 가능성은 낮아졌다. 특히 증상 기간이 더 짧은 군에서 더 긴 군으로 넘어갈 때마다 좋은 결과의 가능성이 약 22%씩 줄어드는 것으로 보고됐다. 결국 "조금 더 참아보자"는 선택이 회복 기회를 조금씩 깎아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척추 수술, 막연한 공포만으로 미룰 일은 아니다=진료를 하다 보면 척추 수술이라는 말만 들어도 겁부터 내는 환자들이 많다. "수술하면 더 못 걷는 것 아닌가", "차라리 참고 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묻는 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적절한 환자를 골라 적절한 시점에 시행하는 척추 수술은,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체계적이다.

필자가 서울대학교병원 재직 당시 참여한 2023년 연구에서도, 적절한 환자에게 시행한 경추 척수증 수술은 비교적 안전하게 이뤄졌다. 수술 후 새롭게 마비가 발생한 경우는 2% 미만이었고, 환자들의 기능과 삶의 질 역시 수술 후 뚜렷하게 호전되는 경향을 보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수술 자체를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을 정확히 알고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몸의 신호=다리 저림이 모두 허리 때문인 것은 아니다. 허리병인 줄 알고 시간을 보내는 사이, 척수증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은 단순한 저림의 문제가 아니라 보행장애와 마비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다리가 자꾸 꼬이거나 발이 걸리고, 손이 둔해져 예전보다 일상적인 동작이 서툴어졌다면 더 이상 단순한 허리 통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는 허리만 볼 것이 아니라 목과 등까지, 척수 전체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좀 쉬면 낫겠지" 하고 넘기기보다, 정확한 신경학적 진찰과 필요한 MRI 검사를 통해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리가 저리면 무조건 허리 탓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익숙한 생각 뒤에, 마비를 부르는 척수증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척수증은 빨리 알아차릴수록 지킬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제때 의심하고 정확히 진단하는 일이다.

<김준회 제주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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