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성의 한라시론] 4·3, ‘이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말라
입력 : 2025. 11. 27(목) 03:00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한라일보] 지난 9월 개봉된 '건국 전쟁2'는 편향된 관점으로 4·3을 왜곡하고 있다. 일각에서 4·3을 '이념'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 이를 경계하고자 글을 쓴다.

해방 후 미군정에 그대로 고용된 친일 경찰은 폭력적인 데다 모리배와 결탁해 이권을 챙겨 도민 반감이 컸다. 미군정은 공출제를 부활시켜 도민의 공분을 샀다. 광역단체인 '제주도'가 되면서 가난, 실업, 공출에 과도한 세금까지 더해져 도민 불만이 가중됐다. 좌익·우익을 떠나서 누구나 비판적 목소리를 내던 때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재편성한 인민위원회는 각계각층 사람이 참여해, 이념에 의해 휘둘렸던 조직이라기보다 미군정과 상호협의하에 운영한 자치활동 성격이 강한 조직이었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하는데 이는 엄연히 불법적인 공권력 사용으로, 진즉에 미군정이 사과하고 책임자 처벌, 진상 규명에 나섰다면 원만히 해결됐을 일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사태 해결보다 육지에서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불러들여 무차별 체포와 폭행, 고문, 처형을 자행하며 도민 분노를 키웠다.

1947년 3월 10일 총파업에 제주 경찰 20% 포함, 공무원뿐만 아니라 직장인 95%가 참여했다. 미군정과 경찰이 파업 참가자를 탄압하자 박경훈 제주도지사는 지사직을 사임하고 시위대 의장직을 맡지만, 박경훈 지사를 두고 좌익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부당한 외세 개입에 제주도민은 제주 특유 '괸당' 정서로 똘똘 뭉쳐 대응했다. 하지만 서북청년단과 응원 경찰은 '빨갱이 사냥(Red-hunt)'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스스로 4·3 봉기를 촉발하는 요인이 된다. 1년 만에 무려 2500여 명을 검거하고, 폭행 및 고문으로 학생과 청년 3명을 고문치사로 사망케 한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로 번진 6월 항쟁을 떠올려보면 좌익·우익 이전에 당시 제주 사회가 얼마나 술렁였는지 알 수 있다.

사회주의자 김달삼 세력이 주동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당일 이들의 습격으로 경찰 4명 등 총 14명이 사망했다. 350명 남짓이던 이들은 극단화되며 고립을 자초했다.

당해 4월 28일에 경비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김달삼이 평화회담 합의에 도달하는데, 이는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무산된다. 오라리 방화 사건은 이후 우익청년단 소행임이 드러난다. 이승만 정부는 '중산간 초토화 작전' 5개월간 전체의 67.2%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일어났다. 희생자 중 35.4%는 여성, 아동과 노인이다. 제주 사람 최소 3만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도민을 상대로 한 끔찍한 만행에 대해 무장대, 미군정, 이승만 정부, 서북청년단 그 누구도 죄를 면할 수 없다. '이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말라. <김용성 시인·번역가·교사>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199 왼쪽숫자 입력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오피니언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