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터뷰/ 현수언 서예가] 학생 천 명 ‘좌우명’ 새긴 아흔의 서예가
입력 : 2026. 01. 11(일) 20:00
박소정 기자 cosorong@ihalla.com
10년간 천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서예로 쓴 좌우명 족자를 선물한 현수언 서예가.
소암 가르침 받아 서예의 길
46년 교직 퇴임 후 재능기부
이중섭 시 ‘소의 말’ 등 휘호
10년 전부터 초·중 졸업기념
1300명에 좌우명 족자 선물
"아이들 기쁨이 저의 기쁨…
후배 서예가들 이어갔으면"


[한라일보] 지난 7일 열린 서귀포시 서귀포여자중학교의 제64회 졸업식. 교사가 졸업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른다. 호명을 받은 졸업생들은 체육관 강당 위에 올라와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생이 한명 한명 강당에 올라올 때마다 화면에는 학생 이름·사진과 함께 서예로 쓴 '좌우명 족자(簇子)'가 띄워졌다.

'꿈꾸는 자는 행복하다', '시작하면, 시작된다', '남들이 뭐라하든, 나답게 사는 것이 진짜 자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한걸음만 더 걸어라', '우리의 시간이 별이 된다' 등 학생마다 스스로 지은 좌우명은 다양했다. 졸업생 140명의 좌우명을 하나 하나 붓글씨로 쓴 이는 아흔의 서예가 현수언(92) 선생이다.

서귀포 원로 서예가인 그가 서화를 벽에 걸 수 있게 만든 족자 위에 학생들의 좌우명을 써내려 간 지도 10년이 넘어섰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초·중등학생 1300명에게 서예로 쓴 좌우명을 졸업선물로 줬다.

그가 이 같은 활동을 이어간 건 46년간 교직생활의 영향이 컸다. 교직에 있던 중 1976년 42세에 서예에 입문한 그는 17년간 소암 현중화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서예 공부를 했고, 소암 선생이 던진 "부탁하지 말라"는 교훈에 따라 작가가 되기까지는 22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그가 든 생각은 '내가 배운 것으로 남을 기쁘게 할 수 없을까'라는 깨달음이었다.

1999년 법환초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후 그는 묵묵히 서예로 재능기부를 이어갔다. 틈나는대로 산방산, 천지연폭포 등 도내 주요 관광지를 찾아 2005년부터 7년간 제주에 온 신혼부부 1700여 쌍에게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휘호를 써 줬다. 또 2012년부터 5년간 화가 이중섭 거주지를 찾는 이들에게 이중섭의 시 '소의 말'을 붓글씨로 써서 나눠줬다. 매년 '입춘'때는 새해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입춘첩'을 써 곳곳에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계속 '학교'에 있었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늘 무언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졸업을 앞둔 초·중학생들에게 삶의 좌표를 심어줄 좌우명을 서예로 써주는 것을 떠올렸다. 곧장 그의 고향인 남원에 있는 남원중에 직접 찾아가 이를 제안했다. 학교에서 관련 수업을 진행한 뒤 학생들이 정한 좌우명을 받아 그가 족자에 붓글씨로 써주는 방식이었다. 일부는 미리 쓰고, 일부는 학교 현장에서 직접 휘호해 학생들에게 서예를 눈에 담게 하기도 했다. 남원중을 시작으로 한 '좌우명 쓰기'는 서귀포중, 서귀포중앙초, 법환초, 효돈초, 남원초, 의귀초 등 서귀포시 지역 학교들로 퍼져갔다.

현 서예가는 "처음에는 관심이 없는 학교도 있었지만 점점 이에 관심을 보이는 학교가 생겨났다. 학생들이 스스로 지은 좌우명은 학생들에겐 '스스로의 약속'이 아닌가. 분명 자꾸 보다보면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나이가 있어 현장에서 붓글씨를 쓰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학생들에게, 학부모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때 마다 저절로 힘이 생겼다. 아이들이 기뻐하면 바로 그 기쁨이 저의 기쁨"이라고 전했다.

50년 서예의 길을 걸어오고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배움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는 "요즘엔 책을 더 많이 읽는다. 나의 지식이 되려면 하루에 10번 이상 읽어야 한다"며 "배움을 지속해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고 싶다. 후회없이 서예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좌우명 쓰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며 "후배 서예가들 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남겼다.

박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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