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 만약에 우리] 이제야 너에게 쓰는 편지
입력 : 2026. 01. 05(월) 03:30수정 : 2026. 01. 05(월) 07:17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영화 '만약에 우리'
[한라일보] 어떤 기억은 세월 안에서 그 힘이 너무 세다. 대체가 되지 않는 상태로 영원히 제 자리를 차지하고 단숨에 나의 지금을 압박해오는 육중하고 두터운, 그때의 너라는 무게. 이상할 정도로 잊히지 않는 숫자들도 있다. 그때 너의 전화번호는 분명히 바뀌었을 텐데 왜 나는 문득 그 숫자들을 갑자기 누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혹시라도 누군가 받으면 끊을 거면서, 한 마디 안부도 전하지 못할 거면서 말이다. 망망대해에 나타날 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시 그 숫자들을 조심스레 눌러본다. 불안과 설렘이 교차하는 마음의 바다 위로 번지는 그때 너의 미소, 나의 불안 우리의 이별이 선명하게 떠오르다 이내 고공 위로 사라지는 풍선처럼 흐릿해 진다. 너는 이제 내 곁에 없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도 없어. 그런데 이상하지 그때의 우리가 계속 여기에 있어. 너와 나를 이루고 있던 뿌리가 수면 위에서 꿈틀대는 것을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환영처럼 보았어. 잘라버렸던 우리라는 나무가 여전히 어딘가에서 자란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 참 거짓말 같은 시간이 흘렀네.



김도영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구교환과 문가영이 주연을 맡은 영화 <만약에 우리>를 보면서 마음이 철렁거리는 소리에 당황스러웠다. 극화된 남의 연애사를 보는 일이야 이제 심드렁해 질 때도 됐건만 마치 방음이 좋지 않은 멀티플렉스에 온 것처럼 보고 있는 영화와 무관한 소리들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종종 예고도 없이 나의 지금을 찾아오는 너라는 소리, 그때 우리가 나눴던 대화, 아직도 나누지 못했던 침묵, 후회 뿐인 고성과 삼켰던 애원들이 뒤엉킨 채 배우들의 대사 위에 더블링처럼 웅웅 거렸다. 어떤 영화들은 그렇게 보는 이의 한때를 기어코 소환해내고야 만다. 누군가 첫사랑이 달콤했다고 말한다면 금세 수긍할 수 있다. 그렇게 싱그러운 단내는 어디서도 맡아볼 수 없었던 종류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첫사랑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고 말하는 이 앞에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주와 담배의 텁텁하고 매캐한 첫 모금을 닮은 그 맛이 첫사랑의 끝자락 즈음에 나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던 것을 선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달고 쓴 첫사랑,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그 이상하고 간지럽고 간절했던 시간들을 담은 영화 <만약에 우리>는 예기치 못했던 그 첫사랑과의 재회에서 시작한다. 가슴이 철렁거릴 수밖에.



고향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은호(구교환)의 시야에 정원(문가영)이 들어온다. 인연으로 갈 법한 우연이 같은 고속버스 옆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에서 하나가 된 연인으로 발전한다. 서로의 상처를 일찌감치 알아 챈 두 사람은 사랑의 시간에 자연스레 생활의 무게를 더하면서 20대의 한때를 서로의 어깨와 등에 의지하며 살아낸다. 사랑이 가르쳐 주는 것들은 혈기왕성한 젊음의 무한한 가능성과 닮아 있어서 둘은 낙담 보다 낙관으로 삶을 예쁘게 물들인다. "너는 분명히 잘 될거야." 와 "너는 분명히 행복해 질거야." 라는 덕담 같기도 혹은 주문 같기도 한 예쁜 말들을 서로에게 내밀면서.



그런데 그 미래형의 문장들이 자꾸만 유예된다. 한 걸음 앞에 있을 것 같던 안정과 평화가 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멀리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두 사람의 발은 이미 퉁퉁 부르터 있다. 상대의 고단함을 먼저 안쓰럽게 느낄 만큼 너를 향해 움직이던 몸은 어느새 나 하나 가눌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 쓰러지기 바쁘다. 두 사람의 단란했던 낙원이 이제는 나 아닌 타인으로 인해 비좁기만 한 현실이 된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이별의 징조는 악몽처럼 온다. 온 힘으로 서로에게 달려가던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한 발 물러설 때 나쁜 꿈에서 도무지 깨지지가 않는다. 우리들의 천국은 그렇게 닫혔다.



<만약에 우리>의 두 주인공, 다시 만난 은호와 정원이 사용하는 가정법은 이별이라는 숙제를 뒤늦게 풀고 싶은 이들의 간절한 기도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꼭 하고 싶었던 좋은 안녕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아온 이들을 위해 영화는 두 사람의 재회를 선물한다. '그때의 나는 너에게서 다 받았다' 고 이제와 말하는 그 마음을 관객들도 모르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즈음에 철렁거리던 마음의 파문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천천히 잦아들며 고요해 졌다. 그 잔잔한 물결 위로 한참을 참고 있던 말들을 띄워 보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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