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모른다는 곳에서
입력 : 2026. 03. 30(월) 03: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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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한라일보] 이랑 작가의 책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를 읽고 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동시에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아티스트 이랑의 가족사 이야기다. '가족사'라는 세 음절 안에 얼마나 많은 세월의 주름과 각질들이, 여전히 응고되지 않은 상처들이 있는지는 가족의 일원인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깊숙이 알고 있으리라. 제목처럼 이 책은 '모녀 관계로 맺어진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다. 자주 황망하고 몹시 슬픈 동시에 신비로울 정도의 활력과 생기로 넘치는 글이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에 대해 남성인 나는 다 알 수 없다. 내 할머니들과 내 어머니, 내 여동생 그리고 수많은 친구, 동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머무르는 한국사회의 지형도에서는 안전한 타자일 수 밖에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랑의 책을 읽으며 긴 세월 동안 고통스러웠음이 분명했을 내 가족 안과 밖의 여성들을 자주 떠올렸다. 그 무게를 나눠지려 했던 내 시도의 시간들이 희미하게 존재했음을 기억해 냈지만 금세 그런 것을 떠올리는 내가 좀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선한 의도와 간헐적인 시도가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모르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읽던 책을 덮고 관람을 고민하던 영화를 예매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페미니즘 영화라는 정보 정도를 알고 있던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는 여전히 모른다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들이 있음을 또 한 번 알게 해주는 영화였다.
2023년 만들어진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1946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흑백 영화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관객들을 놀래 킨다. 귀신보다 무섭고 부적마저 안 통하는 가부장제의 혼령이 80여년 전 저 먼 이탈리아의 부부 침실에서도 형형하게 존재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뺨을 맞고 시작하는 델리아의 하루는 한숨을 쉴 틈 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밥벌이를 위해 방문 주사를 놓고 속옷 수선을 하고 빨래 노동과 우산 수리를 해야 한다. 그렇게 번 돈을 남편에게 가져다 주어야 한다. 숙련된 기술자인 델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산의 기본 구조도 모르는 신입 직원보다 적은 돈을 받는다. 여자라서 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당시, 거기에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델리아의 삶을 가득 채우는 일상적 폭력으로 관객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남편도 시아버지도 두 아들들과 사위가 될 청년까지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만든다. 과거 델리아와 사랑했던 사이였던 한 남자가 그녀의 일상에 약간의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주긴 하지만 그라고 딱히 델리아의 현생에 도움이 되진 못한다. 영화의 후반부 델리아의 친절에 더 큰 친절로 화답하는 이가 말도 안 통하는 이방인인 미국 군인이라는 사실은 델리아가 딛고 사는 그 땅의 척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내내 코메디 장르의 리듬 위에서 진행된다. 군데군데 뮤지컬 요소가 삽입되어 당혹스러운 낙천성을 띠는 구간도 존재한다. 대체 저 상황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전개가 가능한가 싶은 역설의 날카로움이 웃음기를 지운다. 상황도, 사람도 그 무엇도 델리아를 돕지 않고 그녀의 탈출은 요원해 보인다.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온 삶이 훗날 어느 정도의 무게로 그녀를 짓누를지 생각하면 안타까운 한숨이 나온다. 그녀가 선택하는 것은 무엇일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의 백미는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구간에 존재한다. '우리는 연애편지 대신 내일을 선택했다'는 포스터의 홍보 문구처럼 영화는 범상한 멜로 드라마의 엔딩을 짐작했던 관객들에게 반전을 선사한다. 선택할 수 있는 내일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 사이에 델리아와 딸 마르델타가 있고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남편은 군중 속에서 존재감 없이 사라진다. 실화에 기반을 둔 이 교육 효과가 충분한 코미디는 눈물에 젖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파도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생기로 엔딩에서 새롭게 스타트하는 영화다. 모른다는 곳에서 모르고 있었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 알고 나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폐허를 보는 일이 배움이 아닐 리 없을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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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내내 코메디 장르의 리듬 위에서 진행된다. 군데군데 뮤지컬 요소가 삽입되어 당혹스러운 낙천성을 띠는 구간도 존재한다. 대체 저 상황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전개가 가능한가 싶은 역설의 날카로움이 웃음기를 지운다. 상황도, 사람도 그 무엇도 델리아를 돕지 않고 그녀의 탈출은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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