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작] 오이지 (이수연)
입력 : 2026. 01. 02(금) 01:00
박소정 기자 cosoro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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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오이 냄새는 여름보다 먼저 온다. 장마도, 매미 울음도 아직이건만 오이 냄새가 뒤섞인 축축한 공기가 코끝에 달라붙는다. 나는 여름이 또 오고 말았음을 실감했다. 지긋지긋한 여름. 치가 떨리는 오이. 다른 사람들은 라일락이나 수국, 장미와 같은 향기로 여름을 기억한다지만 내겐 언제나 오이 냄새였다. 스무 살에 이 집을 떠난 후에야 그것이 이곳만의 냄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과 냄새는 한 몸이다. 서울에서 네 해를 보낸 내 몸은 오이 냄새를 맡는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비닐하우스 속에 갇힌 볼품없는 인생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나의 손발에는 오이 넝쿨이 휘감겨 있다. 달아나려 할수록 더욱 질기게 감겨 나를 이 집에 묶어 둔다.
나는 늙은 오이처럼 물컹하게 늘어진 이불 덩어리를 발로 밀어내곤 거실로 나갔다. 아침 일찍 비닐하우스 열댓 동에 물을 주고 점심을 먹으러 돌아온 아빠가 아직 눈곱도 떼지 않은 나를 보며 쯧 혀를 찼다. 부모는 몸이 부서져라 뼈 빠지게 일하는데, 자식은 취업 준비한다는 핑계로 방 안에 틀어박혀 늘어지게 잠이나 잔다는 비아냥은 굳이 하지 않는다. '오 씨는 오이 키우라고 내려온 성이여'. 고작 2대째인 가업을 오씨 집안의 천명으로 여기는 아빠는 남자와 여자의 가정 내 역할을 엄격하게 구분 짓는 사람이었다. 불화를 다스리고 자식을 교육 시키는 건 엄마의 몫으로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에 앉아 마늘 껍질을 까던 엄마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해가 중천인디 팔자 좋다."
못 들은 척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십수 년은 된 듯한 델몬트 오렌지주스 유리병에는 차갑게 식힌 보리차가 담겨 있었다. 작년까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이 집에는 그 흔한 정수기조차 없었다. 끓여 마시면 되는 게 물인데, 사치스럽게 돈을 내고 마실 필요 없다는 할머니의 고집 때문이었다. 요즘 레트로 감성이 유행한다고 들었다. 중고 나라에 글을 올리면 팔 수 있으려나. 나는 궁상의 흔적이 물때처럼 찌들어 있는 유리병을 고풍스러운 빈티지로 둔갑시킬 사기적인 생각을 하며 마른 목을 축였다. 눈꺼풀에 눌어붙어 있던 졸음이 갈증과 함께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이것아. 아빠는 새벽부터 나가서 땀 뻘뻘 흘리고 왔는데 지 입만 입이지. 얼른 아빠도 물 따라드려."
"나도 밤새 자소서 썼어."
남들처럼 해외 연수를 다녀오지도, 인턴십도 해 보지 못한 나였다.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라고. 국내에서 했던 대외 경험을 거짓말로 지어내느라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내가 고분고분하게 물을 떠다 드리지 않고 항변하자 엄마의 눈썹이 비닐하우스의 비닐처럼 팽팽히 당겨졌다.
"오미경."
엄마가 낮게 내 이름을 부르며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엄마의 옆자리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청하고 있던 강아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교대 가서 선생님이나 하라니까. 문헌정본지 뭔지 하는 데 가서 쓸데없이 가서 고생이여!"
"서울 신촌에 있는 학교 들어갔다고 동네방네 현수막 걸고 콧대 세우고 다닐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뭐라 하는데. 경기 안 좋아서 취업 문 바늘구멍인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취업 못 하겠으면 시집이라도 가든가. 집안에 남자 하나라도 있어야 운이 풀리지."
"엄마 딸, 아직 스물넷밖에 안 됐어. 취집하기엔 아직 앞길 창창한 나이라니까?"
"그러니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너 반겨주는 남자 만나서 시집가라는 말이여."
"남자들은 눈 없는 줄 알아? 누가 나같이……."
예쁘지도 않고, 직업도 없고, 집안도 변변치 않은 앨 데려가겠어. 요즘 애들 학벌 하나 가지고는 스펙으로도 안 쳐. 어느 동네 사는지, 부모님 직업이 뭔지 다 따진다고. 나는 목구멍 끝까지 치고 올라온 자기비하적인 말을 간신히 삼켰다. 나를 비참하게 하는 건 엄마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이게 꼬박꼬박 말대꾸지. 잔말 말고 아빠 물이나 따라드려!"
엄마는 잔소리로 사람을 진창에 내던지는 재주가 있었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그새 닫은 물병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여보. 밥."
보리차를 받아 마신 아빠가 심드렁하게 식탁에 앉았다. 눈만 뜨면 잔소리하는 엄마도, 끝까지 지지 않고 대드는 나도. 모든 게 마뜩잖으면서 아빠는 눈을 감고 분란을 외면한다. 머릿속엔 오로지 줄기와 잎을 갉아 먹는 응애를 박멸해 월말에 출하할 오이의 생산량을 늘리는 것뿐이다. 하나 남은 자식임에도 대를 잇지 못하는 딸은 지독하게 익어버린 오이보다 못한 존재였다. 쓸모도 효용도 없는 병충해 같은 존재.
"두 번 상 차리게 하지 말고 너도 와서 먹어."
속살을 허옇게 드러낸 마늘이 한가득 쌓인 쟁반을 들고 엄마가 일어섰다. 하는 수 없이 냉장고 안에서 밀폐용기들을 꺼냈다. 오이소박이, 오이무침, 오이냉국, 오이지. 하나둘 열린 용기 속 반찬은 죄다 오이였다. 밥상이 온통 초록색으로 채워졌다.
"다른 반찬 없어?"
"백수 주제에 뭘 따지고 앉아 있어. 있는 거 먹어."
"오이 알레르기 있다고 몇 번을 말해. 먹을 게 하나도 없잖아!"
언젠가부터 오이를 먹으면 목 안쪽이 따가웠다. 호흡 곤란이 와 죽을 정도로 심한 증상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수포가 올라와 얼굴이 뒤집어졌다. 나는 보기만 해도 가려움이 느껴지는 오이를 한껏 노려보다가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냈다. 밥상머리에 죽상으로 앉아 물에 만 밥을 먹느니 차라리 방에 들어가 혼자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이 농장 자식이 오이 알레르기가 있다니. 말이 되는 소리여?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승에서 통곡하시겠다."
기어코 엄마가 한소리를 던졌다. 아빠는 여전히 모녀 싸움에 끼어들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밥을 씹고 있었다. 나는 종종 이 집의 냄새가 내 인생을 결정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몸에 맞지 않는 오이 향을 맡고 자라서 결국 오이 냄새 나는 인생을 살게 된 건 아닐까. 대학 졸업 증명서 한 장으로는 사방에서 풍겨 나는 절여진 삶의 냄새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아작아작. 물이 끓기만을 기다리는 사이, 잘게 자른 생오이를 씹어 먹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강아지가 양푼에 코를 박고 열심히 오이를 먹고 있었다.
"아이구, 우리 집 오이가 맛있긴 맛있지? 우리 빠삐. 예쁘게도 먹네. 빠삐가 아니라 예삐다, 예삐."
엄마가 나를 비난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냥한 목소리로 강아지를 칭찬했다. 얼마 전 집 앞에서 며칠이나 배회하는 걸 보고 주워 온 강아지였다. 보송한 털, 작은 체구,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댕그란 눈. 품종이 파피용이라고 했던가. 애교가 많고 오이를 좋아하는 그 강아지는 어린 시절 먼저 하늘로 떠난 동생 미주를 닮았다. 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지닌 미주는 온 가족이 사랑하던 아이였다. 오이 냄새만 맡아도 인상을 찡그리는 나와는 달리 미주는 아빠가 갓 수확한 오이를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고는 했었다. 나는 미주가 늘 부러웠다. 한 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 똑똑한 머리와 무용수처럼 작은 얼굴, 긴 팔다리는 나에게 없는 것이었다. '언니도 공부 잘해요', '언니도 예뻐요' 미주는 어른들이 자신을 칭찬하면 꼭 나의 이야기도 꺼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는 줄도 모르고.
애교가 많고 오이를 좋아하는 그 강아지는 어린 시절 먼저 하늘로 떠난 동생 미주를 닮았다. 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지닌 미주는 온 가족이 사랑하던 아이였다.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하러 갔던 이맘때 여름이었다. 미주를 데리고 개울 건너에 있는 신당에 갔었다. 으스스한 분위기와 기괴하게 생긴 산신 인형, 색색깔의 연꽃 조화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물씬 자극하는 미지의 산물이었다. 미주보다 나은 무언가가 나에게도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일 작정이었다. 나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니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몰래 숨어 들어 신당 안을 탐험했다. 우물쭈물하던 미주가 나를 보고 용기 내어 부채와 신칼, 삼지창 등의 무구 따위가 보관된 상자를 열었다. 마침 그때 무당이 신당 안으로 들어왔다. 분을 허옇게 칠한 얼굴과 소복을 입은 모습이 마치 귀신 같았다. 우리는 혼비백산 달아났다. 나는 개울가로 가면 곧바로 잡힐 것 같아 반대편의 산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미주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도 모르고. 눈앞에서 사라진 나를 찾아 헤매다 그만 말벌 집을 건드려 벌에 쏘인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애정의 총체를 잃은 엄마가 나를 사고의 원흉으로 삼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나의 호승심만 아니었다면 불행은 우리를 비켜 갔을 것이다. 갖은 노력에도 나는 미주를 대신할 수 없었다. 동생의 기일이 돌아올 때면 나는 빈자리를 돌아보는 대신 미주만큼 예쁘지 않은 내 얼굴을 거울로 확인하곤 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잃는 건, 남은 사람에게 한평생의 경쟁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엄마가 강아지를 '예삐'라고 부르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건 미주가 어릴 때 부르던 별명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남의 개 끼고 살 건데. 그러다 영영 주인 못 찾아주게 되면 어떡하려고."
"누군지 알아야 찾아주든 말든가 할 거 아녀. 당근에 글 올려놨는데 소식이 없어."
엄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연락이 없다는 걸 핑계 삼아 예삐를 키우려는 듯했다. 나는 끓는 물을 용기에 붓고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강아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목줄에 적혀 있는 보호자 연락처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비 날개 같은 모양의 쫑긋 선 귀를 옆으로 젖히고 목줄을 풀었다. 오래되어 보이긴 하나 고급스러운 악어가죽에 달린 동그란 고리에는 금박으로 각인되었던 강아지 이름과 주인 이름, 연락처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제…… 제갈?"
낯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글자를 곱씹었다. 지난 상반기 공채 시즌 3차 면접에서 탈락했던 중견기업 식품 회사의 회장이 희귀 성씨를 지닌 사람이었다. 다시 목줄을 채우고 다 익은 컵라면을 방으로 가져갔다. 어디선가 예삐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인스타그램을 설치했다. 공채에서 모두 떨어진 후 과시적인 사진과 광고로 점철된 피드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지워 버렸던 앱이었다. 로그인을 마쳤다. 피드에 가장 먼저 뜬 건 같은 과 동기의 해외 인턴십 사진이었다. 대학 교수를 부모님으로 둔 동기는 내가 미주 다음으로 질투했던 아이였다. 뉴욕의 빌딩 숲을 배경으로 한껏 포즈를 취한 동기의 사진을 무시한 채 돋보기 버튼을 눌렀다. 사장 면접을 앞두고 면접관의 취향을 알아보고자 개인 SNS를 찾아봤었다. 그때 스치듯 사진을 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라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온갖 사진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회장이 널따란 잔디 정원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사진을 발견해 냈다.
숨이 약간 빨라졌다. 악어가죽 목줄을 한 사진 속 개는 분명 예삐였다. 산 하나 너머 명당으로 소문난 언덕에는 각종 사회지도층의 호화 별장이 모여 있었다. 별장에 놀러 왔다가 예삐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포털 사이트에 '강아지를 찾습니다'를 검색해 보았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전단의 사례금 시세는 대략 100만 원에서 500만 원 사이였다. 찾아주면 사례금을 받을 수 있을까? 돈 대신 여름방학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냐고 물어볼까? 나는 보물섬 지도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질렀다. 취업에 실패하고, 고향에 내려와 엄마에게 구박받으며 사는 지금의 나에게 백만 단위의 돈은 구원의 값이었다. 핸드폰을 꼭 움켜쥐었다. 나는 어떡해서든 예삐를 이용해 이 집을 벗어날 발판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엄마 마트 다녀온다."
문이 쾅 닫히고, 뒤이어 터덜거리는 경차 엔진 소리가 났다. 나는 미리 꺼내둔 볼캡을 뒤집어쓰고 거실로 나갔다. 아빠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비닐하우스로 돌아갔다. 집 안에는 나와 강아지뿐이었다. 고요한 적막이 집 안을 감쌌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고, 부엌 싱크대에는 점심 설거지가 포개져 있었다. 나는 엄마가 벗어놓은 고무장갑 안쪽에 맺힌 물방울들을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안방 침대에 누워있던 예삐가 내가 나오는 기척을 듣고 꼬리를 흔들며 발치로 다가왔다.
"예삐. 산책하러 갈래?"
너, 얘, 거기. 늘 적당한 대명사로 강아지를 부르다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혓바닥을 내밀어 코를 핥던 예삐가 나의 제안에 앞발을 딛고 일어서 깡충거렸다. 나는 예삐를 안아 들었다. 털이 길게 늘어져 커 보였을 뿐, 몸은 의외로 가벼웠다. 이토록 조그만 존재가 사람의 마음을 통째로 붙잡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운동화를 꿰어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에게 들킨 것도 아닌데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심장이 빨리 뛰었다.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햇빛이 머리를 내리찍는 시간이었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온 뜨끈한 공기가 발목을 감쌌다. 산을 빙 둘러 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어야 했다.
"집에 가기 싫어? 할아버지 만나야지."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이 없어 산책은 처음이었다. 갈 길이 먼데 예삐는 세 걸음 가면 멈춰 서서 주변 냄새를 맡았다. 손에 걸린 목줄을 움켜쥐고 억지로 잡아끌어 비닐하우스 틈을 가르는 포장도로로 향했다. 오이 덩굴은 밖에서 보기엔 그저 푸르른 줄기였다. 지독히도 풍겨 오는 오이 냄새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고개를 푹 숙이지 않고 당당히 걸었을 것이다. 비닐하우스 사잇길을 지나 대로변에 진입했다. 화물차가 지나다니는 길이라 가로수라고 할 만한 나무가 없었다. 그림자 하나 없는 길을 걷다 보니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던 예삐도 걷는 게 힘들어졌는지 느릿하게 발을 옮겼다. 조금만 더 힘을 내.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셔. 어서 가서 구질구질 궁상맞은 집에서 벗어나자. 나는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모를 말을 계속 내뱉었다. 아끼던 강아지를 보고 감격해 마지않는 회장을 상상하며. 평일이라 별장에 사람이 없을 거란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환영받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곧은 직선으로 길을 정비한 별장 촌은 구불구불한 골목 위주의 우리 동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두리번거리는 행인의 눈짓마저 감시하겠다는 듯 여러 대의 보안 카메라가 설치된 담장과 차단기가 달린 게이트. 그것들은 같은 범주의 경계를 엄격히 가르는 선이었다. 처음 서울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위압감과 배척감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나는 교양 수업에서 배웠던 아비투스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개인의 취향이 주변 환경, 종교, 계층, 가치관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용어였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에서 지식과 교양을 익혔음에도 장소에 녹아들지 못한 채 계급적 위축감을 느끼는 나는 아비투스를 갖추지 못한 존재였다. 애꿎은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더 옷을 갖춰 입고 올 걸 후회가 일었다. 걸어오면서 흘린 땀으로 인해 척척하게 젖은 겨드랑이가 부끄러워졌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어깨를 움츠리는 나와는 달리, 예삐는 담장 너머에서 풍겨 나오는 잔디 냄새와 예스럽게 휘어진 나무의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이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확신을 얻은 나는 용기를 내어 회장의 집을 찾았다. 사진 속 회장의 별장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너른 정원을 품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집이었을까. 키를 훌쩍 넘는 담벼락에 가려져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수상해 보이더라도 대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허리를 숙여 창살 틈새로 보이는 안쪽을 살폈다. CCTV가 붉은 점을 깜빡이며 집 주변을 기웃거리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목줄을 쥔 손바닥에서 땀이 나고 목덜미에도 열기가 올랐다. 그러나 나에게는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떳떳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선의에서 비롯한 행동이었다. 공연히 겁을 집어먹고 허둥댈 필요가 없었다.
단지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사람의 기척 대신 풀벌레 울음과 에어컨 실외기 도는 소리만 멀찍이 섞여 들렸다. 나는 냄새를 맡는 예삐에게 부러 끊임없이 말을 걸며 사진 속 정원의 금송과 같은 모양의 나무가 있는지 한 집 한 집 체크했다.
"분명 이 동네가 맞을 텐데……."
4미터는 될 법한 금송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평생을 자연에서 자라왔다. 전지를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근처에 다른 별장 촌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지도 앱을 실행하려던 찰나였다. 유달리 담이 높아 위엄이 느껴지는 언덕 위 집에서 갑자기 고성이 들렸다.
"대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형이 안 했으면 누가 했는데! 회사 지분 더 가져가려고 수 쓴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나 아니라고. 없는 말 지어내서 사람 모함하지 마!"
분노에 찬 목소리가 담벼락을 타고 울렸다. 나는 몸을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코를 킁킁대던 예삐도 제자리에 주저앉아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가 보자. 아는 사람일지 모르잖아."
타이밍이 썩 좋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단서를 찾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까웠다. 목줄을 짧게 잡아당겼다. 예삐가 죽어도 가지 않겠다는 듯 명령을 거부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삐를 안아 들고 언덕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예삐가 흥분한 듯 헥헥 숨을 내쉬었다. 분명 사진 속 그 집이었다. 유럽의 한 가정집을 연상하게 하는 기둥 모양과 지붕의 색상이 같았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금송 또한 우뚝 서 있었고. 화면 속 환상의 세계가 실제 크기로 눈앞에 존재했다. 카메라 렌즈에 초점이 맞춰지듯 별장과 가까워질수록 주변 풍경이 선명해졌다. 나는 개 비린내가 옷에 배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예삐를 꼭 끌어안았다.
벨을 누르고자 대문으로 향하던 때였다. 검은 세단 두 대가 내 옆을 지나쳐 별장 앞에 줄지어 섰다. 이내 흰 장갑을 낀 운전기사들이 뒷좌석의 문을 일제히 열었다. 검은 치맛자락 밑으로 드러난 가죽 구두에서 광택이 흘렀다. 차 안에서 내린 사람들은 상복을 입었음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진한 향냄새. 미주를 떠나보내며 지겹도록 맡았던 죽음의 냄새였다. 차마 그 틈에 끼어들 용기가 없어 골목 한구석에 서서 눈치만 살폈다. 잠시 후, 눈에 익은 얼굴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두 줄이 그어진 완장을 왼팔에 착용한 그는 마지막 면접 자리에서 마주쳤던 사장이었다. 넥타이를 쓸어내리던 손이 지금은 상복 자락을 털고 있었다.
나는 예삐를 잠시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강아지를 든 회장의 사진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느라 최신 기사는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포털 사이트에 뉴스난에는 부고 소식이 기사로 올라와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예삐를 쓰다듬는 회장, 그리고 가족을 찾아준 보답으로 나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모습. 직장인이 되어 더는 오이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 삶. 잠시나마 꿈꿨던 모든 미래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다가, 예삐를 안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둘이나 잃었다. 무사한 예삐의 모습을 보여주면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지 몰랐다. 힐끗 쳐다보는 운전기사의 눈길이 뺨에 닿았다. 그러나 상복을 입은 자들은 서로에게 신경이 향해 있어 나와 예삐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장이 차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근본도 모르는 천한 새끼를 끌고 들어와?"
"장례식 끝나자마자 이러기야? 이 별장, 아직 네 소유 아니야."
"그렇다고 누나 소유는 아니지. 거기 있는 제비 새끼 건 더더욱 아니고."
"이 새끼가.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눈에 뵈는 게 없다?"
품위가 넘치는 외양과는 달리 말투가 험악했다. 짙은 화장을 한 여자의 눈매가 사납게 찢어졌다.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던 여자가 고개를 팩 돌렸다. 하필 멍하니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 너. 뭐야?"
"아……. 저기 저……. 실례합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작게 나왔다.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보이는 여자와 난처한 빛이 떠오른 사장의 얼굴이 돋보기로 확대한 것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의식적으로 예삐를 꼭 끌어안는 내게 사장이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이 근처 사람은 아니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십니까."
"호, 혹시 이 개. 이 집 개가 아닌가 해서요. 목줄에 제갈이란 성이 적혀 있더라고요."
사장이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 시선을 내려 예삐를 훑었다. 성씨를 언급한 의도를 알아차린 듯 그의 이마에 주름이 얼핏 잡혔다가 풀렸다. 주변 사람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 개. 맞아요. 여기 개."
"다행이다. 드디어 가족 찾아서. 주인도 없이 며칠째 돌아다녀서 걱정했거든요. 목줄 보고 혹시나 하고 온 건데 정말 다행이에요. 애타게 찾으셨을 텐데 이제……."
안고 있던 예삐를 그들에게 보내주려던 찰나였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장이 손을 내저었다.
"잃어버린 줄 알고 정리했던 갠데. 괜한 수고를 하셨네요."
괜한 수고?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 비서. 부의 봉투 남은 거 있지? 가지고 와."
"예."
그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썩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개를 찾아준 사례금을 지급하려는 듯하였다. 지갑에서 노란빛의 지폐가 한 뭉텅이 나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지폐를 세다 말고 내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본 사장이 선심 쓰듯 하얀 수표를 몇 장 더 꺼내 봉투에 넣었다.
"안락사 비용은 이걸로 충분할 겁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 좀 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상중이라 이런 걸 챙길 여력이 도무지 안 돼서."
그 말은 마치 오래된 장롱을 버리기 귀찮으니 대신 폐기물 스티커를 사 붙여달라는 부탁 같았다. 듣고도 믿기지 않아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안락사. 나는 그 단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포함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나가며 보았던 인터넷 기사에서, 다큐멘터리에서 혹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뤄진 존엄한 권리와는 한없이 먼 죽음. 품에 안고 있던 예삐의 체온이 갑자기 뜨겁게 느껴졌다. 녀석은 몸을 떨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자신의 존재가 가족에게 거부당했음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안락사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
확인하듯 되물었다. 사장이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키울 사람이 없어요. 다들 사정이 있어서. 개 한 마리 돌보자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서울로 데려가면 되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대형견이면 모를까. 체구가 작은 예삐를 굳이 별장에서만 키울 이유가 없었다. 내가 좀처럼 봉투를 받아 들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자 사장이 말을 덧붙였다.
"일부러 버린 것도 아니고, 잃어버렸던 건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편하게 보내주는 게 서로 좋잖아요. 넉넉히 넣었습니다. 수고비라 생각하고 이만 돌아가시죠, 아가씨."
그가 예삐를 안은 팔 사이에 봉투를 쓱 끼워 넣었다. 눈매는 휘어져 있었지만, 좋은 말로 달래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눈동자는 차가웠다. 스치듯 지나간 면접자였던 나는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치워버리면 그만인 존재. 예삐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이었다.
"난 들어가겠어. 피곤해. 자기도 가자."
적어도 열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 남자의 팔에 팔짱을 낀 여자가 일행을 재촉했다.
"뭐 해요, 김 변. 가서 유언장 읽을 준비 해야지."
그녀의 말 뒤로, 상복을 입은 자들이 대문을 지나쳐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김 변호사라 불린 남자만이 예삐를 한 번, 아주 의미심장한 눈길로 잠깐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나는 고개를 숙여 벌어진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라도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안락사 비용, 수고비, 편하게, 정리. 사장이 내뱉었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우후죽순 떠올라 한데 뒤섞였다. 끼이잉. 애처롭게 우는 예삐의 목소리가 어쩐지 나를 찾는 미주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언니, 가지 마. 언니, 나 여기 있어. 온몸에 벌을 쏘여 의식을 잃은 미주를 업고 정신없이 뛰었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스쳐 팔 여기저기서 피가 났음에도 다시 일어나 산에서 내려갔었다. 귓가에 닿았던 옅은 숨소리와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의 간헐적 떨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나는 봉투를 보다가, 다시 예삐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데려갈게요."
"말이 잘 통하는 아가씨네. 고마워요."
거짓말처럼 안도한 얼굴을 한 사장이 마지막으로 내게 요청했다.
"어디 가서 우리 집 개라고 말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네요."
그는 미안한 듯 웃으면서도 눈길은 여자가 들어간 별장 안을 향해 있었다.
"이 비서. 동물병원까지 잘 모셔다드려."
"아니에요. 알아서 갈게요."
"그래요? 그럼 나는 이만."
이내 대문이 닫혔다. 끼이이익. 육중한 철문이 완전히 잠기는 소리는 무언가가 진공 포장되는 소리 같았다. 마치 이 별장과 예삐가 차곡차곡 쌓은 서로의 기억을 단단히 밀봉하듯. 나는 예삐를 데리고 돌아섰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붙이기 전에,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콩콩 뛰는 심장 고동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미주가 갓난아기였던 시절에도 이렇게 작고 빠른 박동으로 내 품에 안겼었다. 신기한 마음에 몇 번이고 안아 들다가 떨어뜨릴 뻔해 엄마에게 혼이 났었지.
일찌감치 이별을 예감하고 체념했던 나는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심장이라도 내놓겠다며 의사를 붙잡고 숨이 넘어가도록 울부짖는 엄마의 절망이 두려웠다. 무당과 말벌과 미주의 탓으로 모든 걸 돌리며 견딜 수 없이 날 옭아매는 죄책감을 지우려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미 일어난 일,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슬픔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밖으로 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해는 어느덧 기울어져 있었고 그림자 역시 길쭉해졌다. 나는 예삐를 품에서 내려놓고 다소 가빠진 호흡을 정리했다. 꽃 내음이 섞인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줄곧 동경하던 향기였다. 흙냄새와 비료 냄새가 섞여 지독하게 풍기는 오이 냄새에는 없는 청결함이 어쩐지 거북하게 느껴졌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평생토록 내 코끝에 스며 있던 건 누군가의 손과 발이 닿아 있는 삶의 냄새였음을. 돈봉투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함께 멈춰 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는 예삐에게 말했다.
"잃어버리지 않게 언니 잘 따라 와. 또 한 시간 걸어야 해."
나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엄마가 미주를 사랑했던 방식과 나를 미워했던 방식과 강아지를 죽은 딸의 애칭으로 부르는 방식에 대해. 아빠가 나를 외면하는 침묵과 새벽마다 오이 덩굴을 만지는 손의 온도에 대해. 미주가 살아있을 때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했다. 이 애가 없으면 엄마 아빠의 시선이 나에게 올까. 하지만 정말로 미주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사라졌으면 하는 것과, 영원히 사라지기를 원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적어도 나는 미주를 정리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뒤처지고 소외되는 것이 싫어 애가 타던 그때도. 상실을 받아들인 채 과거를 분리하고 사는 지금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넌 죽지 마. 오래 살아."
불현듯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비닐하우스의 비닐이 그리워졌다. 초록 물을 뚝뚝 흘리는 오이 덩굴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열매들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올 때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예삐도 내 속도에 맞춰 앞서 나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저 멀리 초록색 플라스틱 기와지붕이 보였다. 말도 없이 예삐를 데리고 나와 엄마에게 혼이 날 것 같았다. 잔소리를 퍼부을 얼굴이 대충 그려졌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나는 낮 동안 햇빛에 데워져 익은 공기를 흘려보내는 비닐하우스 사이에서 예삐에게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 널 이지라고 불러야겠다."
오이와 이지. 오이지. 예삐가 눈을 깜빡였다.
"익어도 쓸모 있는 게 오이거든."
내버려두면 금세 썩어 없어질 것들을 더 두고 보고, 더 손을 대고, 더 시간을 들여 살려낸다. 정리하는 대신 묵히는 방식으로. 엄마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오이들로 매번 오이지를 담갔다. 잘 먹지도 않는 걸 왜 그렇게 많이 만드냐고 한마디 해도 꿋꿋하게 오이를 다듬고 소금물을 끓였다. 생긴 건 못났을지언정 정성으로 키운 것들이기에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아서. 그렇게나마 쓸모를 부여해 남겨두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이지야. 오이지."
불러 놓고 조금 간지러워 가슴을 긁적였다. 말장난처럼 붙인 이름인데 입안에서 맴도니 쉬어 빠진 오이지의 맛과는 전혀 다른 달콤한 맛이 났다. 대문 앞에 섰다. 집에 도착했다는 걸 아는 듯이 이지가 몸을 꼼지락거렸다. 현관문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오래된 집 냄새에 섞여 든 오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나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 농장을 물려 받기에는 도시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내 인생 전체에 배어 버린 이 냄새를 지워 버리는 일은 앞으로도 영영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오이 키우라고 내려온 오씨 집안의 장녀였으니까.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한 생명을 안고 이 냄새 속으로 들어서기로 마음먹었다.
"없어진 줄 알고 한참 찾았잖아! 대체 어딜 갔다 이제 기어들어 와?"
인기척을 느낀 엄마가 주방에서 달려 나왔다. 김치라도 하고 있었는지 양손에 고춧가루 양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산책하고 왔어. 산 너머 있는 데까지."
"산 너머? 무슨 변덕이 생겨서 그 먼 곳까지 다녀왔대?"
"요즘 살찐 것 같아서 운동이나 하려고."
"방에 틀어박혀 누워만 있으니 살이 찌지. 안 찌는 게 이상한 겨."
엄마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를 구박하며 팔을 앞치마에 쓱 문질렀다.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듯 펄쩍펄쩍 뛰는 이지에게 "아이고, 우리 예쁜 강아지 산책하고 왔어?"하고 묻는 온도는 역시나 달랐다.
"삼겹살 사 왔어. 엄만 겉절이하고 있을 테니까 밭에 가서 상추랑 파 뜯어와."
"갑자기 웬 삼겹살?"
"하나뿐인 딸년이 오이 못 먹겠다고 난린데 뭐라도 먹여야 할 거 아녀."
먹을 게 없다는 투정이 신경 쓰였나 보다. 어쩐지 나의 작은 반항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오이 농장 딸내미가 오이를 먹지 못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다 해도 엄마는 내 손을 놓지 않을 사람이었다. 가끔 뾰족한 잔소리를 툭툭 던져 상처를 주지만 밑바탕에는 애정이 깔려 있다. 나는 코끝에서 느껴지는 시큰함을 애써 삼키며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나가서 소고기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내가 사려고."
"백수가 뭔 돈이 있다고 그 비싼 소고기를 사?"
"면접비 나왔어."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아껴 놨다 서울 생활할 때나 써."
"알았어."
손을 씻고 나와 집 앞의 텃밭으로 향했다. 하필 어제 비료를 줘 똥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상춧대를 타고 올라온 상추 이파리들을 한 잎씩 뜯어 저녁에 먹을 쌈을 준비했다. 이지가 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흙을 밟고 따라왔다. 자라나고 묵혀지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천천히 익어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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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인디 팔자 좋다."
못 들은 척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십수 년은 된 듯한 델몬트 오렌지주스 유리병에는 차갑게 식힌 보리차가 담겨 있었다. 작년까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이 집에는 그 흔한 정수기조차 없었다. 끓여 마시면 되는 게 물인데, 사치스럽게 돈을 내고 마실 필요 없다는 할머니의 고집 때문이었다. 요즘 레트로 감성이 유행한다고 들었다. 중고 나라에 글을 올리면 팔 수 있으려나. 나는 궁상의 흔적이 물때처럼 찌들어 있는 유리병을 고풍스러운 빈티지로 둔갑시킬 사기적인 생각을 하며 마른 목을 축였다. 눈꺼풀에 눌어붙어 있던 졸음이 갈증과 함께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이것아. 아빠는 새벽부터 나가서 땀 뻘뻘 흘리고 왔는데 지 입만 입이지. 얼른 아빠도 물 따라드려."
"나도 밤새 자소서 썼어."
남들처럼 해외 연수를 다녀오지도, 인턴십도 해 보지 못한 나였다.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라고. 국내에서 했던 대외 경험을 거짓말로 지어내느라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내가 고분고분하게 물을 떠다 드리지 않고 항변하자 엄마의 눈썹이 비닐하우스의 비닐처럼 팽팽히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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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ㅣ 정지란 |
엄마가 낮게 내 이름을 부르며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엄마의 옆자리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청하고 있던 강아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교대 가서 선생님이나 하라니까. 문헌정본지 뭔지 하는 데 가서 쓸데없이 가서 고생이여!"
"서울 신촌에 있는 학교 들어갔다고 동네방네 현수막 걸고 콧대 세우고 다닐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뭐라 하는데. 경기 안 좋아서 취업 문 바늘구멍인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취업 못 하겠으면 시집이라도 가든가. 집안에 남자 하나라도 있어야 운이 풀리지."
"엄마 딸, 아직 스물넷밖에 안 됐어. 취집하기엔 아직 앞길 창창한 나이라니까?"
"그러니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너 반겨주는 남자 만나서 시집가라는 말이여."
"남자들은 눈 없는 줄 알아? 누가 나같이……."
예쁘지도 않고, 직업도 없고, 집안도 변변치 않은 앨 데려가겠어. 요즘 애들 학벌 하나 가지고는 스펙으로도 안 쳐. 어느 동네 사는지, 부모님 직업이 뭔지 다 따진다고. 나는 목구멍 끝까지 치고 올라온 자기비하적인 말을 간신히 삼켰다. 나를 비참하게 하는 건 엄마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이게 꼬박꼬박 말대꾸지. 잔말 말고 아빠 물이나 따라드려!"
엄마는 잔소리로 사람을 진창에 내던지는 재주가 있었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그새 닫은 물병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여보. 밥."
보리차를 받아 마신 아빠가 심드렁하게 식탁에 앉았다. 눈만 뜨면 잔소리하는 엄마도, 끝까지 지지 않고 대드는 나도. 모든 게 마뜩잖으면서 아빠는 눈을 감고 분란을 외면한다. 머릿속엔 오로지 줄기와 잎을 갉아 먹는 응애를 박멸해 월말에 출하할 오이의 생산량을 늘리는 것뿐이다. 하나 남은 자식임에도 대를 잇지 못하는 딸은 지독하게 익어버린 오이보다 못한 존재였다. 쓸모도 효용도 없는 병충해 같은 존재.
"두 번 상 차리게 하지 말고 너도 와서 먹어."
속살을 허옇게 드러낸 마늘이 한가득 쌓인 쟁반을 들고 엄마가 일어섰다. 하는 수 없이 냉장고 안에서 밀폐용기들을 꺼냈다. 오이소박이, 오이무침, 오이냉국, 오이지. 하나둘 열린 용기 속 반찬은 죄다 오이였다. 밥상이 온통 초록색으로 채워졌다.
"다른 반찬 없어?"
"백수 주제에 뭘 따지고 앉아 있어. 있는 거 먹어."
"오이 알레르기 있다고 몇 번을 말해. 먹을 게 하나도 없잖아!"
언젠가부터 오이를 먹으면 목 안쪽이 따가웠다. 호흡 곤란이 와 죽을 정도로 심한 증상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수포가 올라와 얼굴이 뒤집어졌다. 나는 보기만 해도 가려움이 느껴지는 오이를 한껏 노려보다가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냈다. 밥상머리에 죽상으로 앉아 물에 만 밥을 먹느니 차라리 방에 들어가 혼자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이 농장 자식이 오이 알레르기가 있다니. 말이 되는 소리여?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승에서 통곡하시겠다."
기어코 엄마가 한소리를 던졌다. 아빠는 여전히 모녀 싸움에 끼어들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밥을 씹고 있었다. 나는 종종 이 집의 냄새가 내 인생을 결정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몸에 맞지 않는 오이 향을 맡고 자라서 결국 오이 냄새 나는 인생을 살게 된 건 아닐까. 대학 졸업 증명서 한 장으로는 사방에서 풍겨 나는 절여진 삶의 냄새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아작아작. 물이 끓기만을 기다리는 사이, 잘게 자른 생오이를 씹어 먹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강아지가 양푼에 코를 박고 열심히 오이를 먹고 있었다.
"아이구, 우리 집 오이가 맛있긴 맛있지? 우리 빠삐. 예쁘게도 먹네. 빠삐가 아니라 예삐다, 예삐."
엄마가 나를 비난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냥한 목소리로 강아지를 칭찬했다. 얼마 전 집 앞에서 며칠이나 배회하는 걸 보고 주워 온 강아지였다. 보송한 털, 작은 체구,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댕그란 눈. 품종이 파피용이라고 했던가. 애교가 많고 오이를 좋아하는 그 강아지는 어린 시절 먼저 하늘로 떠난 동생 미주를 닮았다. 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지닌 미주는 온 가족이 사랑하던 아이였다. 오이 냄새만 맡아도 인상을 찡그리는 나와는 달리 미주는 아빠가 갓 수확한 오이를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고는 했었다. 나는 미주가 늘 부러웠다. 한 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 똑똑한 머리와 무용수처럼 작은 얼굴, 긴 팔다리는 나에게 없는 것이었다. '언니도 공부 잘해요', '언니도 예뻐요' 미주는 어른들이 자신을 칭찬하면 꼭 나의 이야기도 꺼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는 줄도 모르고.
애교가 많고 오이를 좋아하는 그 강아지는 어린 시절 먼저 하늘로 떠난 동생 미주를 닮았다. 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지닌 미주는 온 가족이 사랑하던 아이였다.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하러 갔던 이맘때 여름이었다. 미주를 데리고 개울 건너에 있는 신당에 갔었다. 으스스한 분위기와 기괴하게 생긴 산신 인형, 색색깔의 연꽃 조화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물씬 자극하는 미지의 산물이었다. 미주보다 나은 무언가가 나에게도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일 작정이었다. 나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니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몰래 숨어 들어 신당 안을 탐험했다. 우물쭈물하던 미주가 나를 보고 용기 내어 부채와 신칼, 삼지창 등의 무구 따위가 보관된 상자를 열었다. 마침 그때 무당이 신당 안으로 들어왔다. 분을 허옇게 칠한 얼굴과 소복을 입은 모습이 마치 귀신 같았다. 우리는 혼비백산 달아났다. 나는 개울가로 가면 곧바로 잡힐 것 같아 반대편의 산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미주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도 모르고. 눈앞에서 사라진 나를 찾아 헤매다 그만 말벌 집을 건드려 벌에 쏘인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애정의 총체를 잃은 엄마가 나를 사고의 원흉으로 삼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나의 호승심만 아니었다면 불행은 우리를 비켜 갔을 것이다. 갖은 노력에도 나는 미주를 대신할 수 없었다. 동생의 기일이 돌아올 때면 나는 빈자리를 돌아보는 대신 미주만큼 예쁘지 않은 내 얼굴을 거울로 확인하곤 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잃는 건, 남은 사람에게 한평생의 경쟁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엄마가 강아지를 '예삐'라고 부르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건 미주가 어릴 때 부르던 별명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남의 개 끼고 살 건데. 그러다 영영 주인 못 찾아주게 되면 어떡하려고."
"누군지 알아야 찾아주든 말든가 할 거 아녀. 당근에 글 올려놨는데 소식이 없어."
엄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연락이 없다는 걸 핑계 삼아 예삐를 키우려는 듯했다. 나는 끓는 물을 용기에 붓고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강아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목줄에 적혀 있는 보호자 연락처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비 날개 같은 모양의 쫑긋 선 귀를 옆으로 젖히고 목줄을 풀었다. 오래되어 보이긴 하나 고급스러운 악어가죽에 달린 동그란 고리에는 금박으로 각인되었던 강아지 이름과 주인 이름, 연락처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제…… 제갈?"
낯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글자를 곱씹었다. 지난 상반기 공채 시즌 3차 면접에서 탈락했던 중견기업 식품 회사의 회장이 희귀 성씨를 지닌 사람이었다. 다시 목줄을 채우고 다 익은 컵라면을 방으로 가져갔다. 어디선가 예삐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인스타그램을 설치했다. 공채에서 모두 떨어진 후 과시적인 사진과 광고로 점철된 피드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지워 버렸던 앱이었다. 로그인을 마쳤다. 피드에 가장 먼저 뜬 건 같은 과 동기의 해외 인턴십 사진이었다. 대학 교수를 부모님으로 둔 동기는 내가 미주 다음으로 질투했던 아이였다. 뉴욕의 빌딩 숲을 배경으로 한껏 포즈를 취한 동기의 사진을 무시한 채 돋보기 버튼을 눌렀다. 사장 면접을 앞두고 면접관의 취향을 알아보고자 개인 SNS를 찾아봤었다. 그때 스치듯 사진을 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라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온갖 사진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회장이 널따란 잔디 정원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사진을 발견해 냈다.
숨이 약간 빨라졌다. 악어가죽 목줄을 한 사진 속 개는 분명 예삐였다. 산 하나 너머 명당으로 소문난 언덕에는 각종 사회지도층의 호화 별장이 모여 있었다. 별장에 놀러 왔다가 예삐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포털 사이트에 '강아지를 찾습니다'를 검색해 보았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전단의 사례금 시세는 대략 100만 원에서 500만 원 사이였다. 찾아주면 사례금을 받을 수 있을까? 돈 대신 여름방학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냐고 물어볼까? 나는 보물섬 지도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질렀다. 취업에 실패하고, 고향에 내려와 엄마에게 구박받으며 사는 지금의 나에게 백만 단위의 돈은 구원의 값이었다. 핸드폰을 꼭 움켜쥐었다. 나는 어떡해서든 예삐를 이용해 이 집을 벗어날 발판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엄마 마트 다녀온다."
문이 쾅 닫히고, 뒤이어 터덜거리는 경차 엔진 소리가 났다. 나는 미리 꺼내둔 볼캡을 뒤집어쓰고 거실로 나갔다. 아빠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비닐하우스로 돌아갔다. 집 안에는 나와 강아지뿐이었다. 고요한 적막이 집 안을 감쌌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고, 부엌 싱크대에는 점심 설거지가 포개져 있었다. 나는 엄마가 벗어놓은 고무장갑 안쪽에 맺힌 물방울들을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안방 침대에 누워있던 예삐가 내가 나오는 기척을 듣고 꼬리를 흔들며 발치로 다가왔다.
"예삐. 산책하러 갈래?"
너, 얘, 거기. 늘 적당한 대명사로 강아지를 부르다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혓바닥을 내밀어 코를 핥던 예삐가 나의 제안에 앞발을 딛고 일어서 깡충거렸다. 나는 예삐를 안아 들었다. 털이 길게 늘어져 커 보였을 뿐, 몸은 의외로 가벼웠다. 이토록 조그만 존재가 사람의 마음을 통째로 붙잡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운동화를 꿰어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에게 들킨 것도 아닌데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심장이 빨리 뛰었다.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햇빛이 머리를 내리찍는 시간이었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온 뜨끈한 공기가 발목을 감쌌다. 산을 빙 둘러 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어야 했다.
"집에 가기 싫어? 할아버지 만나야지."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이 없어 산책은 처음이었다. 갈 길이 먼데 예삐는 세 걸음 가면 멈춰 서서 주변 냄새를 맡았다. 손에 걸린 목줄을 움켜쥐고 억지로 잡아끌어 비닐하우스 틈을 가르는 포장도로로 향했다. 오이 덩굴은 밖에서 보기엔 그저 푸르른 줄기였다. 지독히도 풍겨 오는 오이 냄새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고개를 푹 숙이지 않고 당당히 걸었을 것이다. 비닐하우스 사잇길을 지나 대로변에 진입했다. 화물차가 지나다니는 길이라 가로수라고 할 만한 나무가 없었다. 그림자 하나 없는 길을 걷다 보니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던 예삐도 걷는 게 힘들어졌는지 느릿하게 발을 옮겼다. 조금만 더 힘을 내.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셔. 어서 가서 구질구질 궁상맞은 집에서 벗어나자. 나는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모를 말을 계속 내뱉었다. 아끼던 강아지를 보고 감격해 마지않는 회장을 상상하며. 평일이라 별장에 사람이 없을 거란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환영받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곧은 직선으로 길을 정비한 별장 촌은 구불구불한 골목 위주의 우리 동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두리번거리는 행인의 눈짓마저 감시하겠다는 듯 여러 대의 보안 카메라가 설치된 담장과 차단기가 달린 게이트. 그것들은 같은 범주의 경계를 엄격히 가르는 선이었다. 처음 서울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위압감과 배척감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나는 교양 수업에서 배웠던 아비투스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개인의 취향이 주변 환경, 종교, 계층, 가치관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용어였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에서 지식과 교양을 익혔음에도 장소에 녹아들지 못한 채 계급적 위축감을 느끼는 나는 아비투스를 갖추지 못한 존재였다. 애꿎은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더 옷을 갖춰 입고 올 걸 후회가 일었다. 걸어오면서 흘린 땀으로 인해 척척하게 젖은 겨드랑이가 부끄러워졌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어깨를 움츠리는 나와는 달리, 예삐는 담장 너머에서 풍겨 나오는 잔디 냄새와 예스럽게 휘어진 나무의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이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확신을 얻은 나는 용기를 내어 회장의 집을 찾았다. 사진 속 회장의 별장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너른 정원을 품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집이었을까. 키를 훌쩍 넘는 담벼락에 가려져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수상해 보이더라도 대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허리를 숙여 창살 틈새로 보이는 안쪽을 살폈다. CCTV가 붉은 점을 깜빡이며 집 주변을 기웃거리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목줄을 쥔 손바닥에서 땀이 나고 목덜미에도 열기가 올랐다. 그러나 나에게는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떳떳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선의에서 비롯한 행동이었다. 공연히 겁을 집어먹고 허둥댈 필요가 없었다.
단지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사람의 기척 대신 풀벌레 울음과 에어컨 실외기 도는 소리만 멀찍이 섞여 들렸다. 나는 냄새를 맡는 예삐에게 부러 끊임없이 말을 걸며 사진 속 정원의 금송과 같은 모양의 나무가 있는지 한 집 한 집 체크했다.
"분명 이 동네가 맞을 텐데……."
4미터는 될 법한 금송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평생을 자연에서 자라왔다. 전지를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근처에 다른 별장 촌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지도 앱을 실행하려던 찰나였다. 유달리 담이 높아 위엄이 느껴지는 언덕 위 집에서 갑자기 고성이 들렸다.
"대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형이 안 했으면 누가 했는데! 회사 지분 더 가져가려고 수 쓴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나 아니라고. 없는 말 지어내서 사람 모함하지 마!"
분노에 찬 목소리가 담벼락을 타고 울렸다. 나는 몸을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코를 킁킁대던 예삐도 제자리에 주저앉아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가 보자. 아는 사람일지 모르잖아."
타이밍이 썩 좋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단서를 찾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까웠다. 목줄을 짧게 잡아당겼다. 예삐가 죽어도 가지 않겠다는 듯 명령을 거부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삐를 안아 들고 언덕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예삐가 흥분한 듯 헥헥 숨을 내쉬었다. 분명 사진 속 그 집이었다. 유럽의 한 가정집을 연상하게 하는 기둥 모양과 지붕의 색상이 같았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금송 또한 우뚝 서 있었고. 화면 속 환상의 세계가 실제 크기로 눈앞에 존재했다. 카메라 렌즈에 초점이 맞춰지듯 별장과 가까워질수록 주변 풍경이 선명해졌다. 나는 개 비린내가 옷에 배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예삐를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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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ㅣ 정지란 |
벨을 누르고자 대문으로 향하던 때였다. 검은 세단 두 대가 내 옆을 지나쳐 별장 앞에 줄지어 섰다. 이내 흰 장갑을 낀 운전기사들이 뒷좌석의 문을 일제히 열었다. 검은 치맛자락 밑으로 드러난 가죽 구두에서 광택이 흘렀다. 차 안에서 내린 사람들은 상복을 입었음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진한 향냄새. 미주를 떠나보내며 지겹도록 맡았던 죽음의 냄새였다. 차마 그 틈에 끼어들 용기가 없어 골목 한구석에 서서 눈치만 살폈다. 잠시 후, 눈에 익은 얼굴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두 줄이 그어진 완장을 왼팔에 착용한 그는 마지막 면접 자리에서 마주쳤던 사장이었다. 넥타이를 쓸어내리던 손이 지금은 상복 자락을 털고 있었다.
나는 예삐를 잠시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강아지를 든 회장의 사진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느라 최신 기사는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포털 사이트에 뉴스난에는 부고 소식이 기사로 올라와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예삐를 쓰다듬는 회장, 그리고 가족을 찾아준 보답으로 나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모습. 직장인이 되어 더는 오이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 삶. 잠시나마 꿈꿨던 모든 미래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다가, 예삐를 안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둘이나 잃었다. 무사한 예삐의 모습을 보여주면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지 몰랐다. 힐끗 쳐다보는 운전기사의 눈길이 뺨에 닿았다. 그러나 상복을 입은 자들은 서로에게 신경이 향해 있어 나와 예삐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장이 차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근본도 모르는 천한 새끼를 끌고 들어와?"
"장례식 끝나자마자 이러기야? 이 별장, 아직 네 소유 아니야."
"그렇다고 누나 소유는 아니지. 거기 있는 제비 새끼 건 더더욱 아니고."
"이 새끼가.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눈에 뵈는 게 없다?"
품위가 넘치는 외양과는 달리 말투가 험악했다. 짙은 화장을 한 여자의 눈매가 사납게 찢어졌다.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던 여자가 고개를 팩 돌렸다. 하필 멍하니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 너. 뭐야?"
"아……. 저기 저……. 실례합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작게 나왔다.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보이는 여자와 난처한 빛이 떠오른 사장의 얼굴이 돋보기로 확대한 것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의식적으로 예삐를 꼭 끌어안는 내게 사장이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이 근처 사람은 아니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십니까."
"호, 혹시 이 개. 이 집 개가 아닌가 해서요. 목줄에 제갈이란 성이 적혀 있더라고요."
사장이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 시선을 내려 예삐를 훑었다. 성씨를 언급한 의도를 알아차린 듯 그의 이마에 주름이 얼핏 잡혔다가 풀렸다. 주변 사람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 개. 맞아요. 여기 개."
"다행이다. 드디어 가족 찾아서. 주인도 없이 며칠째 돌아다녀서 걱정했거든요. 목줄 보고 혹시나 하고 온 건데 정말 다행이에요. 애타게 찾으셨을 텐데 이제……."
안고 있던 예삐를 그들에게 보내주려던 찰나였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장이 손을 내저었다.
"잃어버린 줄 알고 정리했던 갠데. 괜한 수고를 하셨네요."
괜한 수고?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 비서. 부의 봉투 남은 거 있지? 가지고 와."
"예."
그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썩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개를 찾아준 사례금을 지급하려는 듯하였다. 지갑에서 노란빛의 지폐가 한 뭉텅이 나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지폐를 세다 말고 내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본 사장이 선심 쓰듯 하얀 수표를 몇 장 더 꺼내 봉투에 넣었다.
"안락사 비용은 이걸로 충분할 겁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 좀 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상중이라 이런 걸 챙길 여력이 도무지 안 돼서."
그 말은 마치 오래된 장롱을 버리기 귀찮으니 대신 폐기물 스티커를 사 붙여달라는 부탁 같았다. 듣고도 믿기지 않아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안락사. 나는 그 단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포함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나가며 보았던 인터넷 기사에서, 다큐멘터리에서 혹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뤄진 존엄한 권리와는 한없이 먼 죽음. 품에 안고 있던 예삐의 체온이 갑자기 뜨겁게 느껴졌다. 녀석은 몸을 떨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자신의 존재가 가족에게 거부당했음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안락사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
확인하듯 되물었다. 사장이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키울 사람이 없어요. 다들 사정이 있어서. 개 한 마리 돌보자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서울로 데려가면 되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대형견이면 모를까. 체구가 작은 예삐를 굳이 별장에서만 키울 이유가 없었다. 내가 좀처럼 봉투를 받아 들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자 사장이 말을 덧붙였다.
"일부러 버린 것도 아니고, 잃어버렸던 건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편하게 보내주는 게 서로 좋잖아요. 넉넉히 넣었습니다. 수고비라 생각하고 이만 돌아가시죠, 아가씨."
그가 예삐를 안은 팔 사이에 봉투를 쓱 끼워 넣었다. 눈매는 휘어져 있었지만, 좋은 말로 달래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눈동자는 차가웠다. 스치듯 지나간 면접자였던 나는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치워버리면 그만인 존재. 예삐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이었다.
"난 들어가겠어. 피곤해. 자기도 가자."
적어도 열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 남자의 팔에 팔짱을 낀 여자가 일행을 재촉했다.
"뭐 해요, 김 변. 가서 유언장 읽을 준비 해야지."
그녀의 말 뒤로, 상복을 입은 자들이 대문을 지나쳐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김 변호사라 불린 남자만이 예삐를 한 번, 아주 의미심장한 눈길로 잠깐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나는 고개를 숙여 벌어진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라도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안락사 비용, 수고비, 편하게, 정리. 사장이 내뱉었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우후죽순 떠올라 한데 뒤섞였다. 끼이잉. 애처롭게 우는 예삐의 목소리가 어쩐지 나를 찾는 미주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언니, 가지 마. 언니, 나 여기 있어. 온몸에 벌을 쏘여 의식을 잃은 미주를 업고 정신없이 뛰었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나뭇가지에 스쳐 팔 여기저기서 피가 났음에도 다시 일어나 산에서 내려갔었다. 귓가에 닿았던 옅은 숨소리와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의 간헐적 떨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나는 봉투를 보다가, 다시 예삐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데려갈게요."
"말이 잘 통하는 아가씨네. 고마워요."
거짓말처럼 안도한 얼굴을 한 사장이 마지막으로 내게 요청했다.
"어디 가서 우리 집 개라고 말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네요."
그는 미안한 듯 웃으면서도 눈길은 여자가 들어간 별장 안을 향해 있었다.
"이 비서. 동물병원까지 잘 모셔다드려."
"아니에요. 알아서 갈게요."
"그래요? 그럼 나는 이만."
이내 대문이 닫혔다. 끼이이익. 육중한 철문이 완전히 잠기는 소리는 무언가가 진공 포장되는 소리 같았다. 마치 이 별장과 예삐가 차곡차곡 쌓은 서로의 기억을 단단히 밀봉하듯. 나는 예삐를 데리고 돌아섰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붙이기 전에,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콩콩 뛰는 심장 고동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미주가 갓난아기였던 시절에도 이렇게 작고 빠른 박동으로 내 품에 안겼었다. 신기한 마음에 몇 번이고 안아 들다가 떨어뜨릴 뻔해 엄마에게 혼이 났었지.
일찌감치 이별을 예감하고 체념했던 나는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심장이라도 내놓겠다며 의사를 붙잡고 숨이 넘어가도록 울부짖는 엄마의 절망이 두려웠다. 무당과 말벌과 미주의 탓으로 모든 걸 돌리며 견딜 수 없이 날 옭아매는 죄책감을 지우려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미 일어난 일,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슬픔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밖으로 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해는 어느덧 기울어져 있었고 그림자 역시 길쭉해졌다. 나는 예삐를 품에서 내려놓고 다소 가빠진 호흡을 정리했다. 꽃 내음이 섞인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줄곧 동경하던 향기였다. 흙냄새와 비료 냄새가 섞여 지독하게 풍기는 오이 냄새에는 없는 청결함이 어쩐지 거북하게 느껴졌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평생토록 내 코끝에 스며 있던 건 누군가의 손과 발이 닿아 있는 삶의 냄새였음을. 돈봉투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함께 멈춰 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는 예삐에게 말했다.
"잃어버리지 않게 언니 잘 따라 와. 또 한 시간 걸어야 해."
나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엄마가 미주를 사랑했던 방식과 나를 미워했던 방식과 강아지를 죽은 딸의 애칭으로 부르는 방식에 대해. 아빠가 나를 외면하는 침묵과 새벽마다 오이 덩굴을 만지는 손의 온도에 대해. 미주가 살아있을 때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했다. 이 애가 없으면 엄마 아빠의 시선이 나에게 올까. 하지만 정말로 미주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사라졌으면 하는 것과, 영원히 사라지기를 원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적어도 나는 미주를 정리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뒤처지고 소외되는 것이 싫어 애가 타던 그때도. 상실을 받아들인 채 과거를 분리하고 사는 지금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넌 죽지 마. 오래 살아."
불현듯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비닐하우스의 비닐이 그리워졌다. 초록 물을 뚝뚝 흘리는 오이 덩굴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열매들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올 때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예삐도 내 속도에 맞춰 앞서 나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저 멀리 초록색 플라스틱 기와지붕이 보였다. 말도 없이 예삐를 데리고 나와 엄마에게 혼이 날 것 같았다. 잔소리를 퍼부을 얼굴이 대충 그려졌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나는 낮 동안 햇빛에 데워져 익은 공기를 흘려보내는 비닐하우스 사이에서 예삐에게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 널 이지라고 불러야겠다."
오이와 이지. 오이지. 예삐가 눈을 깜빡였다.
"익어도 쓸모 있는 게 오이거든."
내버려두면 금세 썩어 없어질 것들을 더 두고 보고, 더 손을 대고, 더 시간을 들여 살려낸다. 정리하는 대신 묵히는 방식으로. 엄마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오이들로 매번 오이지를 담갔다. 잘 먹지도 않는 걸 왜 그렇게 많이 만드냐고 한마디 해도 꿋꿋하게 오이를 다듬고 소금물을 끓였다. 생긴 건 못났을지언정 정성으로 키운 것들이기에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아서. 그렇게나마 쓸모를 부여해 남겨두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이지야. 오이지."
불러 놓고 조금 간지러워 가슴을 긁적였다. 말장난처럼 붙인 이름인데 입안에서 맴도니 쉬어 빠진 오이지의 맛과는 전혀 다른 달콤한 맛이 났다. 대문 앞에 섰다. 집에 도착했다는 걸 아는 듯이 이지가 몸을 꼼지락거렸다. 현관문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오래된 집 냄새에 섞여 든 오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나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 농장을 물려 받기에는 도시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내 인생 전체에 배어 버린 이 냄새를 지워 버리는 일은 앞으로도 영영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오이 키우라고 내려온 오씨 집안의 장녀였으니까.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한 생명을 안고 이 냄새 속으로 들어서기로 마음먹었다.
"없어진 줄 알고 한참 찾았잖아! 대체 어딜 갔다 이제 기어들어 와?"
인기척을 느낀 엄마가 주방에서 달려 나왔다. 김치라도 하고 있었는지 양손에 고춧가루 양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산책하고 왔어. 산 너머 있는 데까지."
"산 너머? 무슨 변덕이 생겨서 그 먼 곳까지 다녀왔대?"
"요즘 살찐 것 같아서 운동이나 하려고."
"방에 틀어박혀 누워만 있으니 살이 찌지. 안 찌는 게 이상한 겨."
엄마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를 구박하며 팔을 앞치마에 쓱 문질렀다.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듯 펄쩍펄쩍 뛰는 이지에게 "아이고, 우리 예쁜 강아지 산책하고 왔어?"하고 묻는 온도는 역시나 달랐다.
"삼겹살 사 왔어. 엄만 겉절이하고 있을 테니까 밭에 가서 상추랑 파 뜯어와."
"갑자기 웬 삼겹살?"
"하나뿐인 딸년이 오이 못 먹겠다고 난린데 뭐라도 먹여야 할 거 아녀."
먹을 게 없다는 투정이 신경 쓰였나 보다. 어쩐지 나의 작은 반항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오이 농장 딸내미가 오이를 먹지 못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다 해도 엄마는 내 손을 놓지 않을 사람이었다. 가끔 뾰족한 잔소리를 툭툭 던져 상처를 주지만 밑바탕에는 애정이 깔려 있다. 나는 코끝에서 느껴지는 시큰함을 애써 삼키며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나가서 소고기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내가 사려고."
"백수가 뭔 돈이 있다고 그 비싼 소고기를 사?"
"면접비 나왔어."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아껴 놨다 서울 생활할 때나 써."
"알았어."
손을 씻고 나와 집 앞의 텃밭으로 향했다. 하필 어제 비료를 줘 똥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상춧대를 타고 올라온 상추 이파리들을 한 잎씩 뜯어 저녁에 먹을 쌈을 준비했다. 이지가 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흙을 밟고 따라왔다. 자라나고 묵혀지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천천히 익어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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