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논단]제주도 길 여행에 대한 생각
입력 : 2011. 12. 01(목) 00:00
최근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이 1940년에 쓴 '제주도 기행'이란 글을 읽었다. '6·25전쟁 일기', '역사 앞에서'로 잘 알려진 김성칠이 28살 나이에 제주도를 일주하고 돌아간 뒤 남긴 이 기행문은 젊은 이방인 역사학도의 감수성과 예리한 문화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4월 봄에 삼성사에서 시작된 그의 기행은 모슬포-서귀포-성산포로 이어지는 제주도 일주의 여정이었다. 그의 눈에 가장 인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역시 돌·바람·여자 삼다(三多)의 섬, 그리고 독특한 경관이었다. 9만7000리나 되는 돌담을 '탐라의 만리장성'이라고 한 것은 김상헌(金尙憲)이 '남사록(南錄)'에 '흑룡만리'라고 표현한 것을 연상시킨다. 여성 인구가 많은 이유를 나름대로 자료에 근거해 분석했고, 제주 여성의 건실한 노동력과 낙천적인 생활, 남성과 동등한 문화 풍습 등에 주목하였다. 바다와 돌담이 빚어낸 단순하게 보이는 경관에서 선이 굵은 제주 풍경의 미학을 떠올렸다. 초가지붕의 얼기설기 얽어맨 밧줄을 보며 제주사람들이 혹독한 바람에 악착같이 싸우며 살아왔음을 짐작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주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놓치지 않았다. 징병·징용 등 강제동원과 4·3의 참화를 겪기 전 제주사람들의 원 모습을 밖에서 본 시선으로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여 놓았다. 등짐 지는 문화, 알아듣기 힘든 언어의 억양, 여성의 강인한 성격, 부부별재산제(夫婦別財産制), 돌담 무덤, 어장을 둘러싼 분쟁, 쌀값 비교, 산업 현황 등을 적어 내려간 그의 기행문은 역사문화 기록에 가깝다. 특히 매년 4000명 가까이 출가물질 나가는 해녀에 주목하여, 그들을 "세계에서 으뜸가는 전업(專業)자", "탐라의 보배"라고 칭송하였다. 해녀들의 출가노동과 청년들의 일본 노동시장 진출에 따른 송금으로 인해 제주도는 육지와는 달리 때 아닌 "돈벼락을 맞은 것 같은 호경기"를 맞이했다고 적었다.

대정 지역에 머물렀을 때에는 '구황방(救荒方)'이란 책을 얻어서 제주의 대용식(代用食)의 비방에 대해 의학·약학·생리학·사회학 분야에서 향후 연구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고 지적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적거했던 집에서는 강도순(姜道淳)이 남긴 수기를 통해 1845년, 1846년 두 해에 걸쳐 추사가 직접 대정 지역의 민폐를 시정해 달라는 글을 서울의 김 참판(參判)에게 올려 관명을 철회시킨 사실을 확인하였다.

김성칠의 제주 기행문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었다. 제주의 자연과 경관, 사람들의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원풍경 기행 글을 70년 전에 한 역사학자는 담백하게 써내려가고 있었다.

최근 제주도는 세계자연유산, 지질공원, 세계 경관의 섬으로 지정·선정되었다. 제주올레, 한라산둘레길, 유배길, 천주교순례길 등이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제주섬을 둘러보는 관광 패턴 또한 점점 경관과 문화,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길 따라 걷는 여행으로 바뀌고 있다.

김성칠의 기행문은 사람들이 다니는 제주섬의 길과 경관에 역사와 문화로써 숨결을 불어넣고 얼을 집어넣은 한 선배의 노작으로 삼을 만하다. 제주 여행의 내용거리가 섬 안에 잠재해 있는데 우리가 너무 무심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제주 사람들이 모르고 지내는 섬의 매력을 가끔은 과거와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겠다.

<박찬식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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