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논단]탐라호국당(耽羅護國堂) 이야기
입력 : 2011. 10. 06(목) 00:00
1105년 섬나라 탐라는 천년 이어진 사직 왕조를 고려에 내어줌으로써 생명을 다하였다. 일찍이 동아시아의 섬 지역에 2천 년 전에 고대문명국가를 이루어내고 천년 왕국을 경영했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탐라의 후손들은 나라 멸망 이후 9백 년이 지나는 동안 진취적이며 대외진출에 적극적이었던 선조들의 왕조사를 잊어버리고 지내왔다. 어쩌면 잊혀져 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168년 탐라 왕족 양수(良守)의 반란으로 인한 피해, 고려말 목호란에 가담한 제주도민에 대한 초토화, 1402년 조선왕조에 의한 성주·왕자 직위 폐지 등 섬사람들은 중앙권력에 의해 억눌려왔다. 중앙 조정은 제주도를 이단과 반란의 터전으로 인식하였다. 그러기에 무근성 옛 탐라도성과 성주청을 말살한 그 자리에 목관아, 관덕정, 무관청을 건설하였고, 제주도를 해안 방어와 국마(國馬) 사육, 유배죄인 수용의 공간으로 만들어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1702년 유교원리주의를 앞세운 이형상 목사는 탐라인들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던 광양당·차귀당을 철폐하기에 이르렀다.

광양당·차귀당은 한라산신(하로산또)을 모시는 탐라호국 신사(神祠)였다. 조선초기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라산신의 동생신 광양왕(廣壤王)이 매로 변하여 탐라의 맥을 끊고 돌아가려던 호종단(胡宗旦)을 죽여 버린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고산의 옛 지명 차귀(遮歸)는 호종단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는 역사적 의미가 이름 속에 스며들어 있다.

탐라 때부터 이어져온 탐라선민들의 신앙 대상이 한라산신과 광양왕이며, 이들을 모신 신전(신당)이 광양당, 차귀당, 광정당, 광원당 등이었다. 남구명의 '우암선생문집'에는 광양당이 제주섬 전역에 산재한 신당의 조종(祖宗)이라고 하였다. 광양당은 지금의 송당본향당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양당과 차귀당은 제주도의 대표적 신당으로서 매년 봄과 가을에 남녀가 무리를 지어 술과 고기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일종의 나라축제(國祭)가 아닐 수 없다. 이형상 목사는 이들 신당과 제사를 불경스럽다고 하여 한라산신에 대한 제사만 유교식으로 남겨놓은 채 탐라의 기억을 담은 신당들을 철폐하여 버렸다. 탐라정신 말살정책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제주도에는 광양벌, 차귀도, 오백장군, 지장샘 등 호종단(탐라침략자) 척결의 탐라호국 전설이 배어있는 역사문화 공간이 하나 둘이 아니다.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수월봉 일대의 자구내, 차귀도, 당산봉, 당목잇당(차귀당) 등은 탐라스토리텔링 문화 벨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성신화로 일컬어지는 탐라개벽신화 못지않게 탐라를 지켜낸 광양왕의 전설과 기억공간을 특별자치 제주도민들이 더욱 사랑하고 가꾸어낼 필요가 있다고 여겨본다. 최근 탐라문화권, 탐라문화광장, 탐라대전 등 최근 '탐라' 열풍이 불 조짐이다. 기록과 자료가 부족하다고 탓하지 말고 수천 년 이어져온 전설을 바탕으로 풍부한 역사문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박찬식 역사학자>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189 왼쪽숫자 입력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목요논단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