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의 문화광장] 예술이 잇는 사람의 길
입력 : 2026. 05. 19(화) 01:00
이나연 hl@ihalla.com
[한라일보] 조선 최고의 거상 김만덕은 1795년 대기근으로 무너지던 제주를 구했다. 사재를 털어 육지의 곡식을 사들였고, 굶주린 도민에게 나누었다. 정조가 '의녀반수(義女班首)' 칭호를 내릴 만큼 조선을 흔든 사건이었다. 단순한 자선이 아니었다. 붕괴 직전의 공동체 생태계를 다시 세운 전략적 결단이었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하게 한다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실천이었다. 그가 객주를 열고 활동했던 산지천과 칠성로는 한때 제주 물류의 심장이자 상업의 정수였다.

그러나 지금 그 거리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칠성로에는 빈 상점이 늘어가고, 산지천을 따라 흐르던 활기는 실종된 지 오래다. 신시가지가 자라는 동안 원도심의 풍경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적막이 겹쳐진 회색 지대가 되었다.

김만덕기념관의 '물길을 따라, 사람길을 잇다'는 그 빈자리를 응시하는 전시다. 기념관과 칠성로의 한 빈 상점, 두 거점에서 다섯 작가가 김만덕의 도전적 경영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한다. 두 전시장은 산지천을 사이에 두고 걸어서 10분이 채 안되는 거리다. 관람객은 그 길을 직접 걸으며 김만덕의 무대였던 현장을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마주하게 된다.

본관에서는 좌혜선 작가의 목탄 드로잉이 김만덕의 시대를 불러낸다. 사진으로 남지 않은 풍경을 작가는 고증과 상상력으로 종이 위에 복원한다. 기록되지 못한 채 지워져 간 여성의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김만덕이 그러했듯, 좌혜선은 보이지 않던 것을 다시 보이게 한다.

칠성로 분관으로 쓰인 공간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한때 '라이킷'이라는 독립서점이 있던 자리였다. 책방을 드나들며 책장 사이를 거닐던 시절의 기억이 또렷한 나로서는, 사라진 줄만 알았던 그 공간이 전시장으로 다시 열린 풍경이 남달랐다. 한 시절을 함께 보낸 곳이 통째로 비어 버린다는 게 어떤 일인지 아는 사람만 아는 감각이 있다.

박지현 작가는 수명을 다한 도무송 목형을 작품으로 호출한다. 종이를 잘라내고 임무를 마친 폐목형이 작가의 손을 거쳐 다른 차원의 조형으로 환생한다. 끝났다고 여겨진 위기의 순간에 새 길을 찾아낸 김만덕의 방식과 닮았다. 시대에 맞춰 스스로를 재구성하며 살아남은 칠성로의 생명력이 그 위에 겹쳤다.

언디파인드(허정·조은비)는 칠성로를 지켜 온 여성 상인들의 인터뷰 다큐멘터리를 펼쳤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김만덕 정신의 현재적 실천임을 그들의 목소리가 증명한다. 이익보다 공동체의 존립을 먼저 두었던 김만덕의 철학이 영상의 결마다 흐른다.

기근이 한 사람의 결단으로 풀렸듯, 침체된 상권도 또 다른 결단으로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엔 그 결단을 예술이 먼저 내디디면 좋겠다. 김만덕이 물길을 따라 제주를 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의 길을 예술이 잇는다. 사라진 책방 자리에서 만난 작품들 앞에서, 오랜만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나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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