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서로에게 빛이 된다는 것
입력 : 2026. 03. 18(수) 01: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한라일보]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 한 편을 봤다. 인물들이 나눴던 대사와 장면 몇 개, 그리고 그때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오래 바라보게 했다.

영화 '파반느'를 보며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처음 본 날이 떠오른 건 당연했다. 그때 나는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잠시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화면 한가운데 가장 환한 빛을 받는 마르가리타 공주인지,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선 화가 자신인지, 아니면 저 멀리 거울 속에 비친 왕과 왕비인지. 그러나 '시녀들'은 좀처럼 하나의 중심으로 고정되지 않고 시선이 자꾸만 흩어지는 그림이다. 시선은 공주의 드레스 자락에서 시녀들의 얼굴로, 화가의 눈길에서 다시 거울 속으로 끊임없이 옮겨 간다. 그래서 그림 앞에 서면 그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마저 슬며시 그 안에 편입되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 '파반느'의 원작 소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는 그러한 시선의 방향을 조금 바꿔 놓았다. 제목은 '왕녀'를 부르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원작에서 주변부에 머물던 작은 체구의 시녀다. 그 작은 어긋남은 아름다움의 기준 밖에 놓였던 존재, 늘 배경으로 남겨졌던 존재를 이야기의 중심에 둘 것임을 조용히 드러낸다. '파반느'라는 말도 본래 느린 걸음의 춤을 뜻한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떠올리면, 화려함보다는 애도의 음률이 먼저 스민다. 크게 울거나 격렬하게 흔들리는 슬픔이 아니라, 쉽게 지나치지 않고 사라져 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려는 느린 마음이 오래 머물고 있음을 상기하는 슬픔 같은 것 말이다.

영화 '파반느'도 그런 속도로 인물들에게 다가간다. 상처 때문에 자신을 가둔 사람들, 사랑받을 수 없음을 확신한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며 조금씩 스스로의 얼굴을 돌아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빛은 누군가를 눈부시게 구원하는 환한 조명이 아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도 한 사람의 자리를 끝내 놓치지 않으려는 작은 불빛에 가깝다.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여기 한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라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빛.

사람이 사람에게 빛이 된다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닐까. 누군가를 거창하게 구원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때로 우스운 존재로 만들고 혹은 지워버리려 할 때 끝내 외면하지 않는 것,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먼저 그의 존엄을 알아봐 주는 것. '시녀들'의 흔들리는 시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표지의 중심에 세운 작은 체구, 그리고 영화 '파반느'가 보여주는 조용한 만남은 꽃도 머뭇거릴 2026년 봄, 우리가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조용히 방향을 일러주는 듯하다. 때로 빛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끝내 바라봐 줄 때 비로소 생겨나기도 한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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