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만석의 한라칼럼] 상처 속에서 피는 향기
입력 : 2025. 10. 21(화) 01:00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한라일보] 유난히 더디게 다가오는 가을이다. 갈수록 길고 무더워지는 여름의 위세에 가을의 자리는 좁기만 하다. 아직도 가시지 않는 더위에 여러 갈등의 열기는 여름 끝자락을 더욱 후텁지근하게 한다. 이념과 세대, 지역과 계층의 틈이 깊어지며 서로를 향한 언어는 날카로워지고 공론의 장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갈등은 과일에 난 상처와 비슷하다. 과일은 상처가 나야 향이 피어난다. 껍질이 터지고 속살이 드러날 때 비로소 감춰져 있던 향이 스며 나온다. 그러나 수확 시기 과일에 난 상처는 과일의 존재 가치를 허무는 흔적이자 부패를 앞당기는 원인이 된다. 상처의 자리가 온전한 향기로 피어나려면 초기에 썩지 않도록 돌보는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다. 느리고 단조롭지만 꾸준함과 고통 속에서 그 상처를 이겨내야 한다.

제주 지역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간 역동적으로 성장하면서 돌보지 않은 상처들이 곳곳에 스며 있다. 개발과 보전의 갈등, 세대 간 인식 차이, 선주민과 이주민의 거리감, 행정과 주민 사이의 불신 등이 켜켜이 쌓여 왔다. 이러한 갈등과 차이, 불신이 지역사회를 갈라놓고 마을을 상처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상처가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심는 게 아니라 공동체 스스로 서로를 돌보는 회복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지역사회의 균열이 곧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틈 속에서 새로운 향이 스며들 기회가 찾아왔고 스스로 향을 내기도 했다.

상처를 마주하지 않는 공동체는 향을 잃는다. 제주의 마을은 그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풍력단지 설치를 둘러싼 논란, 관광 이익의 불균형, 마을 규약과 자치 권한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 등 외견상 공동체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하지만 돌아보면 주민이 주체로 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치던 자리가 합의의 장이 되고, 행정 중심의 결정 구조를 넘어 주민 스스로 해답을 찾아갔다. 공동체 회복의 핵심은 제도에 앞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질서정연한 논리에 앞서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에 있다.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는 이해, 다름을 존중하는 인내, 상처를 드러내고 함께 치유하려는 용기가 있을 때 마을은 다시 향기를 낼 수 있다.

제주는 이미 수많은 상처를 이겨내며 향기를 피워온 섬이다. 4·3의 아픔을 넘어 세계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하고, 특유의 문화와 정체성으로 간난의 세월을 이겨내고 문화도시로 우뚝 섰다.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적 갈등과 공동체의 균열도, 결국은 제주의 정신을 되살리고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 모델을 세워갈 기회일지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갈등 속에서 공동체의 향기를 다시 찾아내는 지혜다. 상처를 마주하고 그 속에서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돌볼 때 상처가 향기를 내뿜고, 제주가 제주다움으로 빛나는 향기로운 섬이 될 수 있다. 상처가 향기가 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제주의 길이다. <문만석 (사)미래발전전략연구원장·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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