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65)제주시 외도동 도평마을
입력 : 2024. 05. 31(금) 00:00수정 : 2024. 06. 02(일) 13:45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생태하천자원 풍요로운 전통적인 교육마을
[한라일보] 먼저 냇가들이 떠오르는 마을이다. 냇가가 없는 마을도 있는 반면 이 마을은 동쪽에서 서쪽까지 2km 정도 되는 지역에 하천이 4개나 있으니 놀랍다. 냇가들이 굽이치며 형성되는 참으로 독특한 마을 형세다. 원장천을 사이에 두고서 이호2동, 노형동과 경계를 이루고. 광령천을 사이에 두고서 애월읍 광령리, 외도1동과 경계를 이룬다. 하천을 지경의 기준으로 보면 원장천과 광령천 사이에 펼쳐진 마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쪽은 월산마을과 해안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호동 현사마을과 외도1동, 외도2동, 내도동과 마주하고 있다. 주변 마을이 8곳이나 되는 마을도 흔치 않다. 마을 안을 동서로 3등분 지으며 흐르는 어시천과 도근천이 주변 나무 자원들을 끼고 있어서 친자연적인 생태자원을 보여준다. 대도시 인근에 이처럼 풍부한 하천생태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부가가치 높은 마을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행정적 장기 계획을 수립한다면 놀라운 혜택이 기다리고 있는 것.

옛 이름은 '벵듸'다. 넓은 평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 한문으로 평대(坪代)라고 부르다가 구좌읍 평대리와 구분하기 위해서 도평대(都坪代)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代라는 글자를 생략해서 도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상동, 하동과 함께 신산마을, 사라마을, 창오마을이 있다. 4·3 당시에 잃어버린 왯벵듸마을은 기억 속의 도평리로 남아있다.

마을 어르신들이 설명하는 설촌의 역사는 족보나 비문을 근거로 350여 년 전에 해풍 김씨와 전주이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후에 풍천 임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점차 커졌다고 한다. 옛날에 주변 마을에서 바라보는 도평리에 대한 인식은 학식 있는 분들이 많이 살고 있는 양반촌이어서 인근 마을 학동들이 도평리 서당에 다녔다고 한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 제주에서 인가받은 학교로는 3번째인 명진학숙이 도평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신학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기에 학교 인가를 받기 위하여 마을 유지들이 전라도 광주까지 3번이나 올라가서 기어코 학교인가를 받았다는 것은 어떠한 마을공동체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마을 규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4·3으로 당한 인명피해가 엄청난 마을이기도 하다. 사망자만 144명, 실종자까지 포함하여 180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1904년 삼군호구가간총책 기준으로 110호에 남자 200명 여자가 202명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마을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는 의미다. 그 참혹한 기억을 가슴에 담고서 살아온 세월.

박재범 마을회장에게 도평리가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살기 좋은 마을입니다." 도평초등학교의 교육환경과 질적 수준을 여과 없이 설명하였다. 젊은 부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에 1996 년경에 학생 수 100명 미만이었던 분교가 지금은 400명이 되었으니 괄목할만한 성장이란 이런 것을 이르는 단어. 여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교육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이 전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교육을 정신문화의 중심에 두고 있는 마을공동체이기에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아이들의 맑은 눈빛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리라.

안타까운 현실도 있었다. 도평초등학교 서쪽 창오교와 인접한 하천 공터를 활용할 수 없어서 마을회가 계획하고 구상하는 사업들을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하천 형태를 정비하면서 매립한 위에 귀한 공간이 형성되었지만 하천부지라는 이유로 행정에서는 어떠한 공익적 사업도 불가하다는 입장. 전국에서 하천 부지를 활용한 다양한 성공모델들이 엄연하게 있음에도 마을 주민들의 진취적인 활용방안에 발목을 잡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태하천을 많이 보유한 마을 특성을 살려서 더욱 효과적인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할 당사자가 행정 당국이라는 사실이다. <시각예술가>

솟을대문의 자존심
<연필소묘 79cm×35cm>

조상 대대로 훌륭한 선비들이 많아 양반촌의 위상을 지켜온 마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그렸다. 전해져 내려오는 속담을 떠올린다. '곧 죽어도 소슬대문!'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아무리 쇠락하여도 양반의 후예임을 솟을대문을 만들어서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자존심이다. 도농복합지역으로 변모해 가는 마을 안길을 걸어가다가 두 세대 전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초가지붕을 바꾼 듯 해보이는 길가 집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결론은 저 모습에 담겨있는 선비정신이다. 단순한 오기나 허세가 아니라 조상들의 양반 자존심을 당대에 이어가겠다는 결기가 느껴졌기에 그렸다. 단순하게 정낭을 걸치고 살아도 농사일하며 살아가기에는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로되 솟을대문을 단 이유를 질감을 더욱 부각할 수 있는 연필소묘로 그린 것이다.

관찰에서 오는 감동적인 사실은 집담이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오랜 옛날에 집을 지어 담을 쌓으면서 인근 냇가의 돌들을 달구지에 싣고 와서 재료로 사용했다는 입증 근거가 포자들이 꽃처럼 피어 있어서 확인되는 것이다. 돌조형물과 관련된 작업을 20년 가까이 한 필자의 눈에 더욱 놀라운 것은 저 둥근 돌들을 가지고 담을 쌓을 수 있는 석공이 과연 '지금 존재하느냐?' 하는 의문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느끼며 그리게 된 것이다. 무심코 지나가는 돌담과 소박한 솟을대문을 통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와 자존심을 되찾으려 하였다. 도평리 가슴속 두 개의 가치를 느끼며.



도평마을의 한라산
<수채화 79cm×35cm>

청록의 계절을 기다려 그렸다. 창오교 위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참으로 평화롭다. 시각적 위치가 주는 오묘함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장소다. 청색 분위기의 한라산과 녹색으로 모두 덮여있는 냇가 주변 풍경. 간면한 대비효과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단순미에서 찾았던 옛 선비들의 단아한 품성을 닮았다. 유유상종이란 이런 것이려니. 도평리에 처음 터를 잡고 생활하려던 조상들 속에는 필경 시각적 사유에 능통한 분들이 있었으리라 확신하며 그렸다. 백록담을 기준으로 동쪽은 직선에 가까운 능선이 올라오고 정점을 지나면 얇은 천이 바람에 너울너울 춤을 추듯 서쪽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니 정중동이 능선 하나 흘러가는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라. 직선과 곡선이 산 하나에서 대비되어 등장하는 시각적 출발점을 얻기가 세상천지를 돌아다닌들 찾기가 쉽겠는가! 신비감을 읽을 수 있는 눈은 고대 그리이스인들이나 도평리의 조상들이나 동일한 능력을 가졌나 보다.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 물매 각도 그대로 보여주는 한라산 뷰포인트다. 차분하고 안온하다. 원경을 바탕으로 입하를 넘긴 초록잎들이 바쁘게 움직여 광합성 작용을 하고 있다. 뙤약볕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들의 동작을 차분하게 그렸다. 실록의 계절은 최소한 한라산 정도의 배경이 있어야 신비롭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것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은 상태를 즐거운 마음으로 마주 할 수 있는 위치가 좋았다. 생태하천의 소중한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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