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88] 3부 오름-(147)괭이모루
입력 : 2026. 09. 15(화) 03:00
김찬수 hl@ihalla.com
존재하던 이름에 맞추어 지명을 해석하는 오류
고양이도 개도 닮지 않아

[한라일보] '궹이ᄆᆞ르', '겡이ᄆᆞ르', '겡이머리'라고도 부르는 오름이 있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있다. 표고 253.2m에 자체높이는 33m다. 이 오름의 형태를 두고 동북향의 말굽형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적인 마루의 모양이 남북으로 긴 S자형이다. 분화구처럼 보이는 지형이 동북쪽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남서쪽에도 있다. 이런 형태를 뭐라 해야 하나?

괭이모루, 오른쪽 봉우리는 송당의 당오름으로 '모루'라는 뜻이다. 동쪽에서 촬영.


'겡이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개가 누워있는 마루'라는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고양이를 닮아서'라 하기도 하고 '개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는 뜻이라고도 해 이래저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풍부한 오름이다. 이와 같이 '개 또는 고양이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는 설명을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다음 조건이 확인돼야 한다. 즉, 어느 방향에서 보아야 고양이처럼 보이는가, 머리·등·꼬리에 해당한다는 지형이 실제로 구분되는가, 송당리 주민들의 오래된 구전에도 같은 설명이 있는가, 옛 문헌이나 지도에서 '괭이' 계열 표기가 확인되는가, '고양이 형상' 설명이 언제부터 나타났는가. 이 자료들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형상 설명만으로 어원을 확정하면, 먼저 존재하던 이름에 맞추어 지형을 바라보는 사후적 형상유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인근 묘비에 가은이지(加恩伊旨)라고 표기했다고 한다. 이 가은이지에 대해 'ᄀᆞ은이ᄆᆞ르' 정도의 음성형을 반영한 것으로 설명한 책이 있다. '가은이ᄆᆞ르'는 '개아니ᄆᆞ르' 정도의 다섯 음절을 가진 말이었는데, 소리가 변하면서 '궹이ᄆᆞ르' 또는 '겡이ᄆᆞ르'의 네 음절로 바뀐 것으로 추정했다. 이 저자는 원래는 '가은이' 또는 '개아니'로서 세 음절로 된 지명이었으며, 음성형은 물론 뜻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가은이지(加恩伊旨)'를 실제 음절의 순차적 음사로만 해석했다는 점에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제주 지명의 한자 차용표기에는 음차와 훈차, 말음 표기가 복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괭이모루, 골짜기가 오름 서쪽에서 당오름 사이를 관통한다. 서쪽에서 촬영. 김찬수


한자로 쓴 지명 해독 신중해야

'가은이지(加恩伊旨)'의 '가(加)'는 '골'의 'ㄹ' 탈락형 '고' 혹은 ᄀᆞ'이거나 여기에 주격조사 혹은 모음 첨가형이랄 수 있는 'ㅣ'가 붙은 일종의 변음 'ᄀᆡ' 혹은 '괴'를 표기하고자 동원한 글자다.

'은(恩)'은 말음 'ㄴ'만 취하려고 동원한 글자다. 즉, '고', 'ᄀᆞ', 'ᄀᆡ' 혹은 '괴'에 관형격 어미 'ㄴ'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정이다. 제주 지명에 흔히 나타나는 방식이다. '이(伊)'란 뜻이 없는 어조사다. '지(旨)'는 'ᄆᆞ르 지'다. 이렇게 되면 '가은이지(加恩伊旨)'는 '괸이ᄆᆞ르' 즉 '괭이ᄆᆞ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가은이' 또는 '개아니'로서 세 음절로 된 지명이었다는 설명은 완전히 전후가 바뀐 것이다. 오히려 '괭이마르'를 한자로 적다 보니 '가은이ᄆᆞ르', '개아니ᄆᆞ르' 등으로 된 것이다.

지명에 보존된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현지 실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괭이ᄆᆞ르는 뚜렷하게 골이 발달한 지형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이어진 듯 보이는 북쪽의 송당오름과 경계, 서쪽 오름 자락에는 길게 골짜기로 둘러쳐져 있다. 이 일대 평야 같은 들판에서는 아주 특징적이다.

'괭이ᄆᆞ르'는 따라서 잠정적으로 '골ᄆᆞ르'에서 변화한 지명일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즉, '골'의 말음절 'ㄹ'이 합성어 내부에서 약화·탈락해 '고ᄆᆞ르'가 됐고, 이어 '고'에 모음 '이'가 결합하면서 /o+i/가 축약돼 '괴ᄆᆞ르'와 같은 어형이 형성됐을 수 있다. 여기에서 '괴'는 제주어 모음 체계의 변화와 지역적 발음 차이에 따라 '게·궤·괘' 등으로 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괭이모루, ‘골이 있는 ᄆᆞ르’

또한 '괴' 계열 뒤에 나타나는 'ㄴ'도 제주 지명에서는 비교적 흔히 나타나는데, 후대에 '괭이·겡이·궹이'로 재분석 됐을 것이다. 특히 /n/이 /ŋ/으로 바뀌는 과정을 규칙적인 음운변화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므로, 일반에 익숙한 '괭이' 또는 '겡이'에 이끌린 어휘 유추나 민간어원적 변형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따라서 '괭이ᄆᆞ르'는 '골ᄆᆞ르'의 'ㄹ 탈락-모음축약과 변이-형태소 경계의 재분석-익숙한 어휘에 의한 유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괭이ᄆᆞ르'를 '골이 있는 ᄆᆞ르'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해석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오늘날의 '괭이' 계열 음형과 고양이·개 형상설은 원래 어원이 불투명해진 뒤 익숙한 어휘와 지형을 연결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 부분은 서귀포시 남원읍의 고이악 혹은 고리악과 같은 의미다. '고이악'이란 골짜기가 있는 오름 즉, '골이오름'이란 뜻으로 지어진 지명이다. '고리'는 '골+이'로 'ㄹ' 다음에 모음 'l'가 따라 나오면서 연음화 한 것이다. '고이악'으로 '리' 대신 '이'로 되는 것은 'ㄹ' 탈락 현상이다. 제주어에서는 'ㄹ' 받침 뒤에 모음이 오면 'ㄹ'이 소리 나지 않고 탈락하기도 한다. 이 발음은 다시 축약하면서 '괴악'으로도 바뀌어 마치 제주어 '고양이'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다. 구좌읍 송당리의 '개오름'은 골짜기가 있어서 'ᄀᆞᆯ올'이었던 것이 '갈'에서 'ㄹ'이 탈락해 'ᄀᆞ올'이 되고, '올'은 '오름'으로 바뀌면서 '가올', '개올', '개오름' 등으로 된 예다. 병악의 고유어 지명 골올이, 견월악의 고유어 지명 골올이 등 여러 사례가 있다. 이처럼 고이악이란 골짜기가 있는 오름이란 뜻이다. 괭이마루(괭이모루)는 '골이 있는 ᄆᆞ르(모루)'라는 뜻이다. (골이 없는) 모루라는 뜻의 인접한 당오름과 대비지명이기도 하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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