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녀를 말하다-4부] 제주해녀 구술사 (2)일본 오사카 강명희 해녀
입력 : 2026. 08. 31(월) 04:00
양유리 기자 glassy3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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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오염으로 일터 빼앗긴 해녀, 일본으로 건너가다

일본서 출생해 7살에 한국으로… 법환리서 물질 시작
남편 떠나보내 가장이 된 해녀… IMF에 다시 일본행
30여 년 해녀 생활 회상하며 “고됐지만 덕분에 행복”
[한라일보]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인근에 한인들이 자주 찾는 한 다방. 주황빛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꽃이 그려진 흰 블라우스를 입은 강명희(90)씨는 다방에 들어서는 손님들에게 연신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다.
강 씨는 새로 온 손님에게 앉을자리를 안내하는가 하면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며 손을 쓰다듬고 근황을 나눴다. 이 다방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강 씨는 약 30년 전 제주에서 오사카로 건너온 해녀다. <한라일보>는 지난달 9일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모모다니의 한 다방에서 강 씨를 만나 제주에서 해녀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강 씨는 1937년 4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강 씨의 부모는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강 씨가 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낯선 땅에서 5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강 씨가 7살이 되자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이들 가족은 서귀면 법환리(서귀포시 법환동)로 터전을 옮겼다. 일본에서 태어난 강 씨는 한국말이 서툴러 초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다. "친구들이 니혼진(일본 사람)이라고 놀리면서 막 나무랐어.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학교에 못 가겠다고 했어. 한 5학년 때쯤 결국 학교를 그만뒀지."
홀로 가족의 생계를 이끄는 어머니를 도와 강 씨는 일찍이 밭일 등 노동에 뛰어들었다. 강 씨는 당시로선 드물게 두 살 연상의 남성과 2년간 연애 후 19세에 결혼했다. 강 씨 부부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낳아 길렀다.
강 씨는 결혼한 뒤에 해녀 물질을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고, 강 씨가 사는 곳은 넓은 바다가 있는 법환이었고, 주변 여성들은 모두 해녀였다. 여자가 물질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주변의 권유에 강 씨는 물질에 뛰어들었다. 광목(무명실로 만든 면직물)으로 만든 물옷부터 연철(허리춤에 차는 쇠), 테왁 등 각종 물품은 남편이 구해줬다.
물질을 그만둔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바닷속은 훤히 기억난다. "아이고 기억나고 말고. 처음엔 물질이 겁나고 해도, 물질하다 보면 느낌이 와. 여긴 들어가면 못 나오겠다. 오늘은 바당(바다)이 너무 세다. 다 느껴져."
바다 날씨에 생명이 달린 만큼 물질은 절대 혼자 가지 않는다. 같은 바다라도 기상이 달라 같은 날이라도 특정 바다에서만 조업했다고 강 씨는 전했다. "그때는 텔레비전(TV)도 없으니까 바당(바다)이 안 세면 도모다찌(친구)들이 물질하자고 해. 같은 법환 바다라도 날씨가 달라. 바당에도 지역이 있어. 망다리, 배엄주리(배염줄이), 막수개(막숙개), 남해. 지역이 더 많긴 하지만 이렇게 4개로 나눠졌어."
강 씨는 주로 오후 3~5시쯤 물질을 시작해 한 번 들어가면 2~3시간가량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물때에 따른 바다의 밝기도 기억했다. "바다가 서물, 너물, 다섯물(물때를 이르는 말)이 있어. 서물날은 좀 밝은 데, 너물날은 조금 어두운 데, 다섯물날은 캄캄하니까. 물질하고 나오면 불턱에서 불도 쬐고. 바다에서 소라랑 전복, 문어, 미역 같은 걸 캐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일시장이나 매일시장에 가서 팔아. 전복이랑 문어가 최고야. 제일 돈이 됐어."
강 씨가 55살이 되던 해에 남편은 일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강 씨는 가족에게 남은 빚을 감당하면서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시기 법환 바다에서는 해양 오염이 발생해 더 이상 조업이 힘들게 됐다고 강 씨는 전했다.
법환 바다는 1971년 호근 재래식 간이분뇨처리장이 들어선 이후 해양오염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졌다. 1980년대에는 분뇨처리장의 오·폐수가 바다로 흘러들어와 법환마을 바다가 크게 오염되는 피해도 발생했다. 1990년대 초 신시가지 개발이 본격화되며 대규모 아파트와 주택 등이 들어섰고, 법환 주민들은 생활 오·폐수가 바다를 오염시킬 것이라며 집단 반대운동을 하기도 했다.
강 씨에 따르면 1990년대 말쯤 법환마을 바다는 더 이상 해녀들이 조업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이 심각했다. "바다가 오염되니까 물건이 안 나와. 물 안이 어두워서 안 보였어. 바다가 더러워진 게 희한할 정도더라고." 해양오염이 없었다면 물질을 계속했을 거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다.
강 씨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다시 건너갔다. "처음 갔을 때 일본말도 기억 안 나고. 공항에서 하루 노숙을 했어. 근데 한국인이 말을 걸면서 일자리를 추천해 줬어. 김치 만드는 가게였는데 거기서 6년을 일했어. 새벽 4시부터 일하면서 빚도 다 갚고, 집도 샀어."
강 씨는 일본으로 이주하며 해녀 생활을 그만뒀다. "너무 힘들었거든. 바다에 들어가면 숨이 꼴깍꼴깍 했지. 숨이 차서 위험할 때도 많았어. 다시 돌아가면 절대 못 해. 생각이 없어."
이처럼 고된 해녀생활이었으나 바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여전하다. 강 씨는 "바다가 밉진 않았다. 젊을 때에는 바다가 잠잠한 걸 보면 들어가서 돈을 벌고 싶었다"며 "바다 덕분에 아이들도 키우고, 지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양유리 기자·강희만 부국장(사진·영상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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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떠나보내 가장이 된 해녀… IMF에 다시 일본행
30여 년 해녀 생활 회상하며 “고됐지만 덕분에 행복”
[한라일보]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인근에 한인들이 자주 찾는 한 다방. 주황빛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꽃이 그려진 흰 블라우스를 입은 강명희(90)씨는 다방에 들어서는 손님들에게 연신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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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희 씨가 일본 오사카 이코노구 모모다니의 한 다방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에 답변하고 있다. 강희만기자 |
강 씨는 1937년 4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강 씨의 부모는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강 씨가 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낯선 땅에서 5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강 씨가 7살이 되자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이들 가족은 서귀면 법환리(서귀포시 법환동)로 터전을 옮겼다. 일본에서 태어난 강 씨는 한국말이 서툴러 초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다. "친구들이 니혼진(일본 사람)이라고 놀리면서 막 나무랐어.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학교에 못 가겠다고 했어. 한 5학년 때쯤 결국 학교를 그만뒀지."
홀로 가족의 생계를 이끄는 어머니를 도와 강 씨는 일찍이 밭일 등 노동에 뛰어들었다. 강 씨는 당시로선 드물게 두 살 연상의 남성과 2년간 연애 후 19세에 결혼했다. 강 씨 부부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낳아 길렀다.
강 씨는 결혼한 뒤에 해녀 물질을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고, 강 씨가 사는 곳은 넓은 바다가 있는 법환이었고, 주변 여성들은 모두 해녀였다. 여자가 물질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주변의 권유에 강 씨는 물질에 뛰어들었다. 광목(무명실로 만든 면직물)으로 만든 물옷부터 연철(허리춤에 차는 쇠), 테왁 등 각종 물품은 남편이 구해줬다.
물질을 그만둔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바닷속은 훤히 기억난다. "아이고 기억나고 말고. 처음엔 물질이 겁나고 해도, 물질하다 보면 느낌이 와. 여긴 들어가면 못 나오겠다. 오늘은 바당(바다)이 너무 세다. 다 느껴져."
바다 날씨에 생명이 달린 만큼 물질은 절대 혼자 가지 않는다. 같은 바다라도 기상이 달라 같은 날이라도 특정 바다에서만 조업했다고 강 씨는 전했다. "그때는 텔레비전(TV)도 없으니까 바당(바다)이 안 세면 도모다찌(친구)들이 물질하자고 해. 같은 법환 바다라도 날씨가 달라. 바당에도 지역이 있어. 망다리, 배엄주리(배염줄이), 막수개(막숙개), 남해. 지역이 더 많긴 하지만 이렇게 4개로 나눠졌어."
강 씨는 주로 오후 3~5시쯤 물질을 시작해 한 번 들어가면 2~3시간가량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물때에 따른 바다의 밝기도 기억했다. "바다가 서물, 너물, 다섯물(물때를 이르는 말)이 있어. 서물날은 좀 밝은 데, 너물날은 조금 어두운 데, 다섯물날은 캄캄하니까. 물질하고 나오면 불턱에서 불도 쬐고. 바다에서 소라랑 전복, 문어, 미역 같은 걸 캐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일시장이나 매일시장에 가서 팔아. 전복이랑 문어가 최고야. 제일 돈이 됐어."
강 씨가 55살이 되던 해에 남편은 일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강 씨는 가족에게 남은 빚을 감당하면서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시기 법환 바다에서는 해양 오염이 발생해 더 이상 조업이 힘들게 됐다고 강 씨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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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씨에 따르면 1990년대 말쯤 법환마을 바다는 더 이상 해녀들이 조업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이 심각했다. "바다가 오염되니까 물건이 안 나와. 물 안이 어두워서 안 보였어. 바다가 더러워진 게 희한할 정도더라고." 해양오염이 없었다면 물질을 계속했을 거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다.
강 씨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다시 건너갔다. "처음 갔을 때 일본말도 기억 안 나고. 공항에서 하루 노숙을 했어. 근데 한국인이 말을 걸면서 일자리를 추천해 줬어. 김치 만드는 가게였는데 거기서 6년을 일했어. 새벽 4시부터 일하면서 빚도 다 갚고, 집도 샀어."
강 씨는 일본으로 이주하며 해녀 생활을 그만뒀다. "너무 힘들었거든. 바다에 들어가면 숨이 꼴깍꼴깍 했지. 숨이 차서 위험할 때도 많았어. 다시 돌아가면 절대 못 해. 생각이 없어."
이처럼 고된 해녀생활이었으나 바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여전하다. 강 씨는 "바다가 밉진 않았다. 젊을 때에는 바다가 잠잠한 걸 보면 들어가서 돈을 벌고 싶었다"며 "바다 덕분에 아이들도 키우고, 지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양유리 기자·강희만 부국장(사진·영상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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