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75] 3부 오름-(134)검은오름과 금산
입력 : 2026. 06. 16(화) 03:00
김찬수 hl@ihalla.com
‘거문오름’, 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져 산맥 같은 오름
이름에 견인된 지명 유래


[한라일보] 검게 보인다는 신기한 오름이 있다. 제주시 연동 표고 438.8m, 자체높이 129m의 검은오름이다. 남사면은 등성마루가 동-서로 평평하고 가파르다. 북사면은 세 가닥의 등성이를 이룬다. 분화구는 북쪽으로 향해 열려 있어 전체적으로 말굽형이다. 오름명의 유래라면서 '검은'은 '감'에 뿌리를 둔 옛말로, 신성의 뜻이라는 이야기도 떠돈다.

이 오름의 지명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고전에 나온다. 금물악(今勿岳), 거문악(巨門岳), 거문악(巨文岳), 금악(琴岳), 금오름 등으로 표기됐다. 지역에서는 거믄오름, 금오름, 금악, 거문악, 흑악(黑岳)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대부분 비슷해 보이지만 흑악(黑岳)이라는 지명이 다소 특이해 보인다. 그렇지만 '흑(黑)'이란 '거문-'의 훈가자로 차자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비슷하기는 매한가지다. 거문악(巨文岳), 거문악(巨門岳)은 음가자, 즉 뜻과 무관하게 한자의 음을 빌려 쓴 표기다. 금물악(今勿岳), 금악(琴岳) 등 '금'이라는 표기는 '거믄-'오름의 '거문'의 축약형으로 볼 수도 있으며, 금물악(今勿岳)은 '거문'의 변음이랄 수도 있다.

어느 책에는 "예로부터 오름이 검게 보인다는 데서 '금을오름' 또는 '검은오름'이라 했으며, 오늘날 '거문오름'으로 쓰는 것은 '검은오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라고 했다. 용감한 주장이다. 과연 이 오름이 지명에 반영할 만큼 검게 보일까? 밤에 보면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훤한 대낮에 볼 때,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볼 때, 불이 나기 전후에 볼 때 제각각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이 오름이 유난히 검게 보인다는 점을 분명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닐까. 지명이란 오래전부터 전승돼 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언어에 끼워 맞추려 하다가는 엉뚱해지기 쉽다. 사실 이 오름은 분석구로서, 침식면을 보면 붉은 송이로 돼있음을 알 수 있다. 여타의 오름들과 색깔의 차이가 없다.

이 오름의 지명 '거문-' 혹은 '거믄-'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길게 연달아 있어서 산맥처럼 보인다는 특징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 오름은 동서쪽 어느 곳에서 봐도 봉우리가 여러 개이며, 분화구 정상을 한 바퀴 돌아보면 봉우리가 여럿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특성은 오름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지형은 아니다. 선흘리 거문오름, 송당리 거문오름 등에서도 공통적이다. 본 기획 관련 오름편을 참조할 수 있다.



주장에는 근거가 제시돼야


지명이 비슷한 오름이 또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표고 63.5m, 자체높이 34m의 낮은 오름이다. 단산의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같은 오름의 일부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이 두 오름은 맞닿아 있을 뿐 같은 오름은 아니다. 이 두 오름의 경계인 세미고개에서 서로 다른 층리를 보여주는 노두를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이 오름은 서쪽으로 굽어 있는데, 부채꼴의 중심점에 해당하는 곳에 커다란 화구호가 있다. 이런 점들로 볼 때 이 오름은 응회환의 퇴적암층으로 오랜 기간 침식돼, 외륜만 남아 있는 형체로 단산과 다른 별개의 오름임을 알 수 있다.

이 오름의 지명은 원대정군지에 '금산(琴山)'으로 표기된 것이 고전의 기록으로는 유일해 보인다. 이에 대해 입산을 금지했던 산, 곧 금산(禁山)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설명한 책이 있다. 오름 정상과 주변에 일제강점기 말 태평양전쟁에 대비해 파놓은 땅굴이 여러 개 있다고 부연해 이런 연유로 출입을 금지했다고 보는 것으로 읽힌다. 실제 이 오름에는 11개나 되는 갱도 진지가 발견된다. 그런데 2012년 '제주도 일제 군사시설 전수 실태조사 보고서(Ⅱ)'에 따르면 제주도에 구축된 일본군 진지는 총 104개소에 달한다. 이 숫자는 개별 진지 동굴이 아니라 진지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 정도 숫자의 오름에 진지가 구축됐다고 보면 된다. 문제는 이렇게 진지 동굴이 있는 많은 오름 중 금산(禁山)이라고 불리는 오름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이것은 "일제가 파놓은 땅굴 때문에 금산(禁山)이라 했고, 여기에서 금산(琴山)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억지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오름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는데 군사시설 때문에 지명이 새롭게 붙었다면 그전에는 뭐라고 불렸는지 아무런 제시가 없다.



산등성이가 긴 '금산'


'원대정군지'라는 책이 출간된 것은 20세기 중반으로, 비교적 최근의 기록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나온 다양한 기록과 채록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 제시한 '금산(琴山)'이란 지명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이 오름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전체적으로 좁고 길다는 데 있다. 마치 산맥처럼 보인다.

이런 지형을 고대어로 '거문-'이라 한다. 이 말은 '산맥', '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진'의 뜻을 갖는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가 있는 거문오름, 구좌읍 종달리의 동거문오름, 위에서 설명한 연동의 검은오름 모두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어지는 특징을 반영한 지명이다. 이 오름 지명과 여기서 설명하는 '금산(琴山)'은 어떤 관계일까? '금산(琴山)'의 '금(琴)'은 '거문고 금'이다. 바로 이 한자의 훈이 '거문고'인데 이 '거문고'의 '거문-'을 나타내려고 이 글자를 동원했다. 연동의 검은오름을 '금악(琴岳)'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다. 그리고 금산의 '산(山)'은 '마르'를 차자할 때 흔히 사용되는 한자다. 산등성이가 평평하고 길어 '거문마르'라 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고대어에서는 산맥을 그 자체로 '거문게'라고 했다. 어쩌면 금산을 그냥 '거문게'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검은오름'이 오히려 '거문오름'에서 유래했다. '거문오름'이란 '산맥 같은', '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진' 오름이란 뜻이다. '거문오름'을 '검은오름'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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