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69)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병률
입력 : 2024. 05. 28(화) 00:00
편집부기자 hl@ihalla.com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삽화=배수연


'사랑한 적'을 향하는 순간에 끝까지 뒷말을 붙들지 못하는 이병률의 사랑. 사랑한 적. 의 마음만을 간신히 잎사귀처럼 쥐어보는 그 사랑의 테두리 안에 떠나는 기차가 있고 '당신'이 부족한 시간이 있으며 눈을 뗄 수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적,에 오고 있다.

이병률의 시에는 한두 개 수학 문제가 끼어 있다. 사랑 하나짜리 집에 여러 적,이 살고 있으며 일 순위 적,은 어느 시제에 속하는지 알 수 없고 독자가 그 답을 풀어야 할 일은 없지만 바깥 층계참에 내리는 눈송이나 짧은 햇살을 후일담으로 들여다보는 건 자유이다.

적, 정도만 말하는 이 감정이야말로 병일 수 있고 '완성'을 재 보지 않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완성이라는 것도 생의 일부분, 그리운 한 봉우리의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과 떠나간 영원이기에 영원을 다시 붙잡을 수 없고 시인은 적,에 머물러야 한다. 덥석 건너뛰지 못한다.

사랑한 적, 마저 놓고서 당신에게 가는 것인가. 영원히 당신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 하나일지도. 적,에서 재빨리 몸을 돌린 사람 중엔 오로지 눈물로 사는 이가 있으리. 그 적,은 어느 극지에 있고 극치에 있다. 그리하여 적,은 이병률의 사랑 목록이 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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