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주마을 탐방] (12·끝)제주시 영평동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흐르는 전원마을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입력 : 2021. 12. 06(월) 00:00
도심.시골 풍경과 천연의 풍광 오롯이 간직한 영평동
500여 년 역사… 상동의 가시나물.하동의 알무드내

토박이-이주민간 소통 화합 사업 다각도 마련 필요

도심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시골 풍경과 천연의 풍광을 오롯이 간직한 마을 영평동, 화북천의 상류인 가시나물천이 깊은 계곡만큼이나 그윽한 운치를 자아내는 이 마을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늑함으로 넘쳐난다. 설촌 500여 년의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마을은 상동의 가시나물과 하동의 알무드내가 어울린 마을이다. 1962년 행정개편이 이뤄진 이래 현재까지 아라동에 속해 있다.

2021년 다라쿳당굿
설촌 역사가 깊은 만큼 이 마을은 반촌(班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일찌감치 마을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보성서당으로 불리던 이 서당은 상동과 하동에 나란히 두 곳이 있어서 10~15세에 이르는 아이들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근대교육이 본격화되며 상동의 보성서당은 보성의숙으로 개편됐다가 화북공립국민학교가 설립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보성의숙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영평상동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영평상동의 식수원이었던 알올리소
이 마을에는 자랑거리가 넘쳐나지만 누구라도 눈으로 보면 홀딱 반하기 마련인 하천이다. 영평상동에서는 가시나물천, 영평하동에서는 부록천이라고 부르는 이 하천은 한라산의 흙붉은오름에서 발원해 화북동 해안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하천이다. 천변 곳곳에 짙은 숲이 우거지는가 하면 계곡 여기저기 샘과 소가 자리해 있어서 예로부터 영평상하동과 월평동, 황사평 등지의 식수원으로 사용돼왔다. 가시나물 사람들의 식수원인 닥리새미와 알올리소 위쪽으로는 월평동 사람들이 찾아들던 동새미와 웃올리소가 있다. 알무드내의 용천수는 수수못은 제주에 널리 알려진 고종달 단혈설화 속의 행기물 중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수량이 부쩍 줄었는데 마을노인들에 의하면 수십 년 전 물을 길러 온 사람이 이 샘에서 엄청나게 큰 장어를 잡아먹은 뒤로 그리 됐다고 한다. 수수못은 인근마을인 웃무드내와 황세왓에서도 찾아들던 샘이라고 한다.

보성의숙이 자리했던 영평상동마을회관
영평상동의 마을까페 곳남모르
내력이 깊은 마을인지라 당굿이며 마을제까지 공동체의 밑바탕이 되는 신앙의 면면도 눈여겨 볼만하다. 영평상동과 영평하동에는 제각기 본향당이 있었는데 하동의 신당마르당은 명맥이 오래 전에 끊겨 지금은 찾아드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영평상동의 본향당인 다라쿳당은 신대기마르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 웃자란 신목(神木)이 멀리서도 보이는 곳이다. 월평동과 함께 모시는 본향당으로 당굿이 끊긴지 수십 년이 흘렀는데 올해부터 다시 치르기 시작해 신앙이 되살아나고 있다. 다라쿳당은 신목의 위용 못지않은 특유의 본풀이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던 '산신백관 산신대왕'이 '은기선생 놋기선생'과 부부의 연을 맺고 이 곳에 좌정했다. 그런데 산육신인 은기선생 놋기선생과 수렵신인 산신백관 산신대왕은 서로 식성이 달라서 육식을 하는 남편신이 바람 아래로 물러나 앉게 되며 같은 신당(神堂) 안에 제단을 따로 두게 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렵목축문화와 농경문화가 교섭하며 발전해온 제주사람들의 생활사를 반영한 신화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정연한 신화를 간직한 신당의 굿이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시작된 것은 날이 갈수록 쇠락하고 있는 제주도 마을신앙의 현실과 맞물려 볼 때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갈채를 보내야겠다.

영평하동 거욱대와 리사제단
마을신앙 중 무속신앙과 더불어 저울의 대칭을 이루는 유교신앙을 살펴보면 현재 영평상동과 하동이 제각기 마을제단을 설립해서 음력 정월 초순에 리사제를 봉행한다고 한다. 애초에 한 마을이었던 시절인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리사제를 함께 치렀었다고 한다. 오늘날 영평동 반석아파트가 자리한 곳이 알무드내인 하동과 상동인 가시나물의 중간지점이어서 그곳에 마을제단을 두고 함께 봉행해왔는데 광복 이후 분제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영평하동 리사제단 바로 옆에는 방사탑의 일종인 거욱대가 있는데 이 마을에는 본래 남대북답이라고 해서 남쪽에는 거욱대, 북쪽의 돌탑이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돌탑은 오래 전에 소실됐다. 거욱대 또한 2000년대 초반에 도난당했는데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 마을회관 뒤쪽에 자리해 있다.

영평하동의 식수원이었던 수수못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사이 영평동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제주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먹돌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4·3의 광풍이 이곳이라고 비켜 가지 않았다. 영평동은 4·3의 발발부터 종결에 이르는 7년 7개월 동안 갖은 수난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 희생당한 이들의 수가 공식적으로 135명에 이른다고 한다. 영평하동보다 높은 곳이라 한라산과 가까운 탓이었는데 영평상동에는 1949년 이후 경찰토벌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며, 그 해부터 1954년에 이르기까지 성을 쌓아 무장대와의 분리를 도모했다. 영평동 주민들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멀리 광양과 화북동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쌓은 가시나물성의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있어서 그 시절의 참상을 상기시키고 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체념 섞인 레토릭처럼 영평마을사람들은 그 모진 살육의 피바람을 이겨내고 마을을 재건해 과거의 영락을 되살려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각종 마을 만들기 사업을 벌이며 도시화와 개인화로 이어지는 현대적 발전의 부작용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영평상동마을회장 김동호
영평상동마을회 김동호 회장은 가시나물마을은 지난 2003년 행정안전부로부터 정보화마을로 선정돼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스마트폰 등을 비롯한 각종 디지털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10월에는 JDC와 함께 갓남마르라는 마을카페를 만들었는데 유휴시절인 감귤선과장을 새롭게 변신시켜 부녀회가 맡아서 운영한다고 한다.

영평하동마을회 양광수 회장은 근래에는 용강동과 이어지는 도시계획도로가 수년 만에 완공돼 주민들의 숙원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지난 2017년에는 마을 공동체 '한디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역량강화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는데 그때 마을여성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알무드내 한디 카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한디 카페는 '촌티나는 하동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마을회관에 함께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제주시내에 입지해 있지만 각종 편의시설이 태부족인 마당에 이같은 마을사업이 이루어지고 도시계획도로가 완공된 것은 여러모로 문화적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불어넣고 있다고 말한다.

영평하동마을회장 양광수
이처럼 영평상동과 영평하동은 전통을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심이 적지 않다. 영평상동의 경우 1000세대에 이르는 가호 중 무려 800세대 이상이 이주민이며, 영평하동은 토박이가 7~8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마을 공동체가 쇠락하는 상황인 셈이다. 토박이와 이주민들 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사업들을 다각도로 마련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두 마을회장은 목소리를 모은다. 설촌 500여 년의 깊은 역사가 그저 옛이야기로만 남고 사위어버린다면 사실상 마을은 사라지고 남 같은 이웃만 남는 무정한 시절과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잦아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포개지는 마을 영평동이 활력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끝>

글.사진=한진오(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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