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3)그대를 위한 작은 기도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입력 : 2021. 09. 28(화) 00:00
시를 쓰던 20년 전 협재 주변
아찔할 만큼 놀랍던 미색 기억
이름을 준 인연 하나 떠올리며

한 달에 두 번 서울 사무실에 출근했다 제주에 다시 돌아오면 그길로 곧장 공항 가까운 용담해안도로나 조천포구 쯤에 가서 바다 공기를 쐬곤 한다. 오늘은 신용목 시인이 보내온 새 시집을 들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았다. 태풍이 막 지나간 해안은 아직도 거친 파도가 파도를 갈아타며 한없이 몰려오고 횟집이었다가 업종이 바뀐 한 카페에서 시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이름은 진소미.

내가 그대에게 지어준 이름은 소미(小美)였다. 그 소미는 내가 20년 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잠시 접고 협재해수욕장 근처에 1년 살 집을 구할 때 도와준 어부이자 농부인 동네 어르신이 찾아와 손녀의 작명을 부탁해 지어드린 이름. 작은 아름다움이 모이면 큰 아름다움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으며 잠깐 이웃이 된 한 여행자가 아기에게 보내는 작은 축복이기도 했다.

그대는 이제 21세의 어엿한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잊힌 이름이고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 이름밖에 없는데, 어느 대목에서 갑자기 그 이름이 떠올라 그대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만나볼 생각도 못 했지만 사실은 아주 가까이 살고 있는데 서로 모를 수도 있지만, 소미는 진소미로 살고 있을 텐데, 한 칸에 한 자씩 슬픔과 아름다움을 채워가며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인생의 긴 여정에서 어떤 아픔도 앓아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법을 익히고 있겠지.

건너편에서 차를 마시며 유리잔에 담긴 꽃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인이 그대일 확률은 정말 적을 것이지만, 이를테면 소미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동년배의 그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는 일은 재미있다. 제주에 살고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이름을 가진 여인이 되었을 수도 있는 소미. 가슴 한쪽에 잠시 들어있다가 이십 년 만에 위로 떠오르는, 그대 이름을 짓기 위해 여러 날 많은 이름 자들을 나열해 보았던 그 옛날의 습자지 한 장을 그대에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꽃송이처럼 환하게 떠오른다. 기도와도 같이.

그리고 귤 상자 몇 개와 책걸상뿐인 방에 깨끗이 한지 도배를 하고 앉아 시를 쓰던 20년 전 당시의 협재 주변이야말로 아찔할 만큼 놀랍고 손 쓸 수 없이 쓸쓸한 미색(美色)이었다는 것을 들려주고 싶다. 그 컬러를 다시 찾아내는 것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도. 그 시절의 여행자의 초심 또한 내게 남아 있지 않겠지만 여행은 여행자의 영토이자 일터이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 속에서 진소미라는 인연 하나를 책 짐과 함께 싸들고 돌아간 것은 행운이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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