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고백하지마
입력 : 2025. 12. 29(월) 03:00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고백의 여정
영화 '고백하지마'
[한라일보] 나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애청자다. 방영되는 거의 모든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꾸준히 챙겨볼 정도이니 이제 습관이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남의 연애를 지켜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스스로에게 물어본 답은 이렇다. '남'이라는 타인의 영역을 호기심으로 들여다 보는 거리감과 '연애'라는 생생한 감정의 결을 맞닥뜨릴 수 있는 실재감, 이 두 가지 요소가 내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발 떨어져 느낀다는 안도감과 극화된 캐릭터들로부터는 충분하게 느낄 수 없는 핍진성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발견한다. 혼자 밥을 먹는 순간에 가끔 숟가락을 떨어 뜨리거나 한숨을 쉬며 술 한 잔을 찾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내 눈 앞에는 설렘과 안타까움, 자조와 분노로 얼룩진 채 '사랑'이라는 감정을 스스로의 밖으로 꺼내 놓은 누군가의 모습이 있다. 이걸 단순히 재미있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오미(五味)를 느낀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배우 류현경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고백하지마>는 흡사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주는 시고 쓰고 맵고 달고 짠 그 '오미'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영화 '하나 둘 셋 러브'의 촬영이 끝난 현장에서 우연한 사고처럼 시작된 영화<고백하지마>는 누군가의 '고백'이라는 마음의 재채기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흥미진진하게 탐구한다. NG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시작된 뜬금 없는 고백이 만들어 내는 파장 그렇게 시작된 낯선 관계 속 철썩이는 파열음이 <고백하지마>내내 때로는 유쾌하게 가끔은 쓸쓸하게 울려 퍼진다. 또한 배우 류현경과 김충길이 실명 그대로 출연하는 이 작품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감정 연기를 지켜보는 묘미 또한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서 갖게 되는 의문 중 하나인 '카메라 앞에서 정말 솔직할 수 있을까? 혹시 저 감정은 연기가 아닐까?'를 반대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배우들은 멜러라는 장르의 옷을 벗을 수 있을까? 연기가 아닌 실제의 감정을 카메라 앞에서 드러낼 수 있을까?' 라는 흥미진진한 관찰자의 시점으로 관객을 데려다 놓는 것이다.

<고백하지마>는 로맨스가 되기를 망설이는 영화다. 현경과 충길은 고백이라는, 둘 사이 사고에 가까운 사건 이후 타인이 아닌 자신을 들여다 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갑작스러운 고백이 남긴 것은 연애라는 해피엔딩의 결말이 아니라 유예라는 다소 성가시고 사나운 시간의 흐름이라서 둘은 자연스레 각자의 시간을 걷게 된다. 그런데 끝난 줄 알았던 고백의 여진이 길 위에서도 느껴진다. 수락과 거절이라는 이분법의 선택 말고도 또 다른 마음의 행로들이 있다는 것을 특히 고백 받은 쪽인 현경은 더 여실히 느끼게 된다.

타인의 마음이 도착해 생긴 파동 위에서 진동하는 것은 홀로 되어 더 뚜렷하게 들리는 내 마음의 소리들이다. 여기에서 <고백하지마>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백스테이지 사운드를 차분한 멜로디로 덧붙인다. 누군가에게 선택 받아야 하는 직업, 장기 계획이 어려운 불규칙한 생활 그리고 누군가를 대할 때 습관처럼 써야 하지만 마음의 피부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는 익숙한 가면까지 생생하게 그려지는 <고백하지마>는 캐릭터의 직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현경과 충길이 연기 없는 세상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덤덤하지만 또렷한 <고백하지마>의 또 다른 곡조를 만들어 낸다. 깔깔 대며 시작한 이야기가 꿀꿀해지는데 까지는 채 70분이 걸리지 않지만 영화는 아주 많은 감정의 색들을 담은 꽤 긴 여행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비유하자면 <나는 솔로>에서 시작해 <환승 연애>로 마무리되는 <고백하지마>는 '혼자에서 다시 혼자'로 가는 여정에 어떤 타인이, 무슨 감정이, 왜 내 마음의 혼란이 있었는지를 옆 좌석에 앉힌 채 어쩌면 나에서 우리가 될 미래라는 그 정처 모를 목적지로 향하는 영화다. 출발 했으니 돌아갈 수 없고 당연히 자주 쓸쓸하며 종종 당황스럽고 가끔은 두근거리는.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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