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74] 3부 오름-(33)방애오름은 펑퍼짐한 오름, 번널오름도 같은 말에서 변화
입력 : 2024. 03. 26(화) 00:00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산정 모양이 펑퍼짐한 오름들, 고대어 ‘펑’에서 기원
‘펑퍼짐하다’의 '펑'은 북방 고대어에서 유래


[한라일보] 서귀포시 동홍동 산1번지 일대, 높은 곳에서 낮은 방향으로 오름 3개가 줄지어 늘어섰다. 높은 곳에서부터 웃방애오름, 방애오름, 알방애오름이라 한다. 방애오름은 표고 1699.3m, 자체높이 129m이다. 웃방애오름은 표고 1747.9m, 자체높이 73m, 알방애오름은 표고 1584.8m, 비고 85m다. 분화구는 원형의 화구 중심이 그다지 깊지도 않고 화구벽으로 갈수록 아주 완만하여 평지 같은 느낌을 준다.

방애오름은 정상이 넓게 벌어져 펑퍼짐하다.
방애오름은 거의 모두 방에와 같은 모양이라는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방에란 제주어로는 '맷돌방아와 같은 말로서 절구와 연자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표준어로도 '곡식 따위를 찧거나 빻는 기구나 설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방애오름의 지형과 비교해 볼 때 위의 풀이에는 해당하는 건 없는 것 아닌가? 어쩌면 남방아를 가리키거나 연자방아의 밑돌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남방아란 네모지고 나지막한 받침 위에 지름 70~150cm의 함지박 모양의 나무통을 붙이고 여기에 지름 20cm, 깊이 20cm가량의 돌절구를 끼워 넣어 공이로 곡식을 찧을 수 있게 만든 농기구다. 과연 이 남방아와 방애오름은 어떤 면이 닮았을까? 연자방아의 밑돌은 상당히 유사할 수 있지만, 제주도에서 이 밑돌만을 따로 방에라고 하지는 않는다.

원시 퉁구스어로 '펭'이 있다. 우리 북방 고대어와 기원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언어다. 눈이나 얼음에 생긴 구멍을 말하는데, 이 말은 점차 '웃다', '빙그레' 등으로 확대되었다. 퉁구스어에 속하는 에벤키어에서 'p'음이 탈락하여 '헹케'가 구멍, '헹네'가 '빙그레 웃다'로 쓴다. 에벤어에서도 유사하다.

원시 돌궐어에서는 역시 'p'음이 탈락한 형태로 바뀌었다. 여기에 속하는 여러 언어에서 '엥-'이 당혹한 표정이거나 '고문을 당하다'의 뜻으로 변했다. 얼굴을 피거나 찡그린다는 다소 거리가 먼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방애오름, 번널오름 지명은 사어(死語) '벙으리다'의 화석


우리 말에서는 그 뜻이 아주 풍부하게 파생했다. 오늘날엔 사어가 되어 쓰지 않는 말로 '벙으리다'가 있다. '벌어지다' 혹은 '벌리다'의 뜻이다. '벌어지다'의 용례로는 1489년(성종 20)에 간행한 의학서인 ‘구급간이방언해’에서 볼 수 있다. 1569년에 소백산 희방사(喜方寺)에서 간행된 불교 교리 칠대(七大)에 관한 한글 교리서 ‘칠대만법’에도 나온다. 그 외로 '벙을다'를 '벌어지다', '벙읏거리다'를 '벙긋거리다'의 뜻으로도 썼다.

지난해 5월 하순 산철쭉이 만발한 방애오름 정상, 분화구가 매우 낮다. 산림청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제공
이 말은 오늘날 '방긋 웃다', '싱글벙글하다', '빙그레 웃다' 같이 '얼굴이 환히 넓어지다'의 뜻을 갖는다. '벙'을 어간으로 하여 파생한 말로 '펑퍼짐하다', '펑퍼지다'라는 말도 있다. '퍼진 모양이 둥그스름하게 넓적하거나 평평하게 널찍하다'라는 뜻으로 쓴다. 우리말에서 'p'와 'b'는 같은 발음이다. 펑, 벙, 팡, 방, 펀, 번, 판, 반으로 변화한다. 이처럼 방애오름의 방애란 방아의 모양이 아니다. 방아란 '빻다'와 어원을 공유하는 말로 빻는 기구를 통틀어 지시하는 것이므로 방에와 같다는 말은 부자연스러운 어형이 된다. 결국, 방애오름이란 고대어 '펭이올'에서 기원한 펑퍼짐한 오름이라는 뜻이다.

번널오름은 병곳오름과 나란히 있다. 표고 272.3m, 자체높이 62m로 낮은 오름이다. 병곳오름은 자체높이 113m이니 번널오름이 훨씬 낮다. 이 오름은 낮으면서 분화구는 매우 넓은 편이다. 동북편이 높은 봉우리인데, 여기서 남서 방향으로 점차 낮아지다가 중간 부분에서 평평해져서 전체적으로 넓적하고 둥그스름하게 생겼다. 세간에서 말안장 모양이라고 하기도 한다.



번널오름, 고대어 '번올'에서 ‘번올악’의 변화과정을 거쳐


번널오름을 지역에서는 버널오름으로 부르고, 번을악(番乙岳), 번판악(番板岳), 번월악(番月岳)으로 표기한다. 번을악(番乙岳)은 음독자로 쓴 것이다. 번판악(番板岳)의 번(番)은 음독자, 판(板)은 '널 판'이므로 훈독자로 쓴 것이다. 이런 기록자들은 번널오름의 의미를 전혀 몰랐거나, '널'과 관련이 있는 그 어떤 의미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정도의 짐작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번월악(番月岳)에 이르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여기에서 쓰인 월(月)은 발음이 '월'이거나 '올' 혹은 개음절로 읽었을 경우 '우리', '오리' 등의 차자일 수 있다. 개오리오름을 견월악(犬月岳)으로 표기한 데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고대인들이 '번올' 혹은 '번오리'라 불렀음을 암시한다. 물장올이나 쌀손장오리에서 볼 수 있는 형태다. 그런데 한자문화권의 기록자가 이런 발음을 듣고 표기한다면 오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당연히 '악(岳)'을 덧붙이게 된다. 이런 과정으로 오늘의 번널오름이라는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오름의 형태는 둥글넓적하여 펑퍼짐하다. 바로 인접하여 봉우리가 좁고 뾰족한 병곳오름이 있다. 그러므로 이 오름은 병곳오름과 대비하여 뚜렷한 특징으로 인식됐을 것이다. '번올'의 '번'은 방애오름의 '방'과 같은 발음이다. 둘 다 어원상 둥그스름하게 넓적하고 평평하게 널찍한 오름이란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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