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70] 3부 오름-(29)골짜기가 있는 병악, 골짜기가 없는 무악
입력 : 2024. 02. 27(화) 00:00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골짜기 유무에 따라 오름의 이름도 달라진다
병악은 쌍둥이오름이 아니라 골짜기가 있는 오름

[한라일보] 서귀포시 상창리 북쪽 끝자락, 상천리 입구 지경 서쪽으로 두 개의 오름이 보인다. 둘 중 남서쪽 대병악, 북동쪽 소병악이다.

대병악은 표고 491.9m, 자체높이 132m다. 소병악은 표고 473m, 자체높이 93m다. 육안으로만 봐도 규모에서 차이가 크다. 그럼에도 입구에 세워진 탐방 안내 간판에는 '두 오름이 나란히 서 있어서 한자로 병악이라고 부른다. 병은 쌍둥이 혹은 형제를 뜻하는 제주어 '골래기' 또는 '골른'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다. 골른 오름이란 쌍둥이 오름이란 뜻이다'라고 설명돼 있다. '골래기'라 하려면 쌍둥이처럼 크기가 아주 비슷한 상태여야 한다.

과연 이 두 오름의 이름 병악은 쌍둥이라는 뜻일까?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1653년 '탐라지'에 병악(竝岳), 18세기 '대정현지도'에 병악(?岳), 1872년 '대정군지도' 등 이후에는 이같이 병악으로 기록했다. 1899년 '대정군읍지', 1910년 '조선지지자료'에는 대병산(大?山)과 소병산(?山)으로 구분 기록했다. 초기에는 두 오름을 하나로 병악(竝岳) 혹은 병악(?岳)으로 표기하다가 점차 두 오름을 구분하여 대병산 소병산 혹은 대병악 소병악으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부터 대병악, 소병악, 무악(감낭오름에서 촬영). 김찬수


골이 없으면 미끈한 오름, 고대인들은 '골' 존재에 주목

개오리오름(견월악)도 한 때 병악(竝岳) 혹은 병악(?岳)이라고 기록했음을 앞에서 보았다. 竝(병)의 약자가 ?(병)이므로 두 글자는 같은 것이다. 오늘날 이 글자는 '아우를 병'이라고 한다. '나란히 하다', '견주다', '함께 하다'의 뜻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1583년 '천자문'과 1576년 '신증유합'에는 '갈올 병'이라고 했다. 한자를 배우는 학동들에게 '아우를 병'이 아니라 '갈올 병'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 뜻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표현이 달랐다.

따라서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1653년 '탐라지'에 병악(竝岳)이라고 기록했다면 이건 '골올악'이라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의 해석 방식에 있다. 이걸 훈독자로 보아 '쌍둥이 혹은 형제를 뜻하는 제주어 '골래기' 또는 '골른'을 한자어로 바꾼 것', 따라서 '골른 오름'이란 쌍둥이 오름이란 뜻'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어쩌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를 쓴 당대의 고수들도 그렇게 봤을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시 기록자들은 현장의 상태를 확인해가면서 기록한 것이 아니다. 들은 바 그대로 옮겨 적는 전사방식이었다. 따라서 '골올'의 뜻을 따져 쓴 것이 아니라 발음 그대로인 '골올'에 '악(岳)'을 붙여 병악(竝岳)이라고 쓴 것이다. 훈독자가 아니라 훈가자 표기가 된다. '골올'이란 골짜기가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개오리오름도 마찬가지다. 병곳오름의 '병' 역시 여기서 출발한다. 현재 접할 수 있는 기록이 전부는 아니다.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런 글자들이 변화를 겪게 되고 다양해진다. 대병악이든 소병악이든 이 두 오름은 골짜기가 깊게 팬 오름이다. 그러므로 제주도 고대인들은 '골'이 있는 오름으로 본 것이다.

개오리오름은 '호수'가 있는 물장올에 대비하여 '골짜기'가 있는 오름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개오리오름의 북동쪽에는 민오름이 있다.

골짜기가 깊게 패인 소병악. 김찬수


오름의 이름, 소통에 유리한 대비지명 사용

오름의 이름을 지을 때 고대인들은 소통에 유리하도록 대비지명을 지었다. '병악'에서도 이런 대비지명을 볼 수 있다. 이 오름의 바로 북쪽에 인접해 무악(戊岳 혹은 無岳으로 표기) 혹은 미악(美岳)이란 오름이 있다. 개오름, 믜오름, 무오름이라고도 부른다. 자체높이 126m로서 대병악과 아주 비슷하다. 이 오름도 화구가 남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오름이긴 하지만 그 벌어진 정도가 너무 넓어 골짜기로 보이지 않는다. 무악(戊岳), 무악(無岳), 미악(美岳)의 '무', '미'는 '미다' 혹은 '빠지다'를 뜻하는 동사 '미다'의 어근이다. 중세어에서는 이 외에도 '뮈다', '믜다'로도 썼다. 그 뜻은 '(머리를) 밀다', '미끈하다' 등을 나타낸다. 이 말에 대해 '나무 없이 믜어있다 하여 믜오름이라 한다'는 설명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미다', '뮈다', '믜다'는 동사이기도 하려니와 형용사로도 쓰는 말이다. '(머리를) 밀다' 같은 취지라면 동사이지만 '미끈하다'라는 취지라면 형용사다. 오늘날의 제주어에서 '민작하다', '민질민질', '민찍민찍' 같은 말들에서 볼 수 있다. 이런 뜻을 고려해 해석한다면 '민-'이란 나무가 없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미끈하다'는 형용사가 나타내는 말에서 왜 '(나무가 없어) 미끈한' 상태를 연상해야 하는가.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민오름이라는 지명에서 지시한 '민-'이란 '골짜기가 없어 미끈한' 상태다. 나무가 없는 오름이라 하려면 나무가 자라지 않는 상태가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무가 있다가 산불 같은 재해로 나무가 사라진 것이라면 언젠가 또 나무가 울창해질 수 있다. 특히 오늘날 '민-' 혹은 '문-'으로 나타나는 일부 오름들은 대부분 숲이 울창하다. 그러므로 이 오름들은 나무가 없어서가 아니라 '골짜기가 있는 오름' 가까이에 있는 '골짜기가 없는 오름'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개가 누워있는 형세라 하여 개오름으로도 부른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戊岳(무악)의 '무(戊)' 자가 개를 의미하는 '술(戌)'자와 유사한 점에 착안하여 누군가 지어낸 말일 것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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