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플러스] 제주의 벌초문화
'식게' 안헌 건 놈이 모르곡 '소분' 안헌 건 놈이 안다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입력 : 2019. 08. 23(금) 00:00
추석을 앞두고 가족묘지를 찾은 벌초객들이 조상 묘에 자라난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한라일보DB
가족벌초부터 모둠벌초까지
한때 학생 위한 벌초방학도
핵가족화로 장묘 문화 쇠퇴
대행 서비스도 새로 생겨나

한여름 무더위에 허덕이다 보니 어느새 추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추석 연휴 기간 동안 가족·친척·친구 등을 만날 생각에 다들 들떠있지만, 추석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바로 벌초다.

벌초는 조상의 묘에 난 잡초를 베어 정리하는 전국적인 풍속이다. 시기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제주지역은 보통 음력 8월 초하루 전후부터 추석 전까지 끝내는 것이 상례다. 추석 당일 고향을 찾지 않는 것보다 벌초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더 큰 불효로 여길 만큼 제주의 벌초문화는 타지역에 비해 독특하다.

▶제주의 독특한 벌초문화=제주지역에서는 '식게 안헌 건 놈이 모르곡 소분 안헌 건 놈이 안다(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은 남이 몰라도, 벌초하지 않은 것은 남이 안다)', '추석 전이 소분 안 허민 자왈 썽 맹질 먹으레 온다(추석 전에 벌초 안 하면 덤불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벌초를 중요시해 왔다.

제주지역의 벌초는 직계가족들이 모여 고조부의 묘소까지 벌초하는 '가족벌초'와 '괸당(친척의 제주어)'이 모두 모여 기제사를 마친 선대 묘 수십 기를 돌보는 '모둠벌초(문중벌초)'가 있다.

예로부터 추석 당일 성묘를 지내는 풍습이 없는 제주에서는 모둠벌초가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정을 나누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자리가 됐다.

모둠벌초는 2000년대 초반까지 주로 음력 8월 초하루에 이뤄졌지만, 직장 업무와 타 도시에 살고 있는 친척 등을 위해 8월 초하루 전후 주말에 행해지고 있다. 이 기간 제주의 중산간 및 들녘 인근 도로에는 벌초하러 온 차들로 붐비고 산속 곳곳에서는 예초기 소리가 들리는 진풍경도 연출된다.

모둠벌초를 위해 제주지역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 학생들을 위한 '벌초방학'이 존재했다.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 벌초를 하는 날 효행사상을 고취한다는 의미에서 방학을 실시했으나, 모둠벌초가 점점 주말에 이뤄져 이제는 볼 수 없는 '추억의 방학'으로 남게 됐다.

한 누리꾼이 온라인에 '제주도에 벌초방학이 존재했었다'라는 글을 올리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제주에만 존재했던 독특한 문화이다.

▶변해가는 벌초문화=저출산·고령화가 심해지고 핵가족화가 보편화되면서 벌초문화도 점점 변해가고 있다.

최근 전국적으로 매장보다 화장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장묘 문화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상의 묘를 정리해 납골당이나 자연장지를 이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제주지역 화장률은 69.4%로 전국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으나, 매년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달라진 문화 세태를 보여주고 있다.

바쁜 일상 탓에 벌초 대행 서비스도 새롭게 등장했다. 지난 2008년 도내 지역농협을 시작으로 현재 산림조합 등에서도 벌초 대행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들 서비스는 위성항법장치(GPS)를 활용해 묘소 위치를 확인, 벌초 후 깨끗하게 정리된 묘소 사진을 찍어 보내주기도 한다.

지난 2014년 1300건에 이르던 이용건수가 2015년에는 1600건으로 느는 등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고 벌초할 후손들이 없는 가정에서 이용이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벌초는 일가 친척이 한데 모여 조상을 기리고 정을 나누면서 공동체를 끈끈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풍속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 변화에 따라 벌초의 의미와 풍습에 대한 세대 간 인식차가 점점 달라지고 있지만, 자신의 뿌리를 되돌아본다는 근본적인 의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벌초하러 모인 가족·친척들과 얘기를 나누며 조상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벌초의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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