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담론]그 분은 왜 나무에게 합장을 했을까
입력 : 2013. 05. 16(목)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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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어린이날 구좌읍 평대리 비자나무숲에 다녀왔다.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국내외 탐방객들, 그 중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사실 이 숲은 교통이 편리하고 평지인데다 탐방로가 잘 정비돼 있어서 날씨에 관계없이 가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날 아주 큰 비자나무 앞에서 나이 지긋한 한 할머니가 합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숲에 들어서니 너무나 울창해 어떤 원시의 숲에 온 느낌이 들었다. 이 숲은 구좌읍 평대마을에서 서쪽으로 5.5㎞ 지경에 있다. 면적은 약 45㏊, 13만5569평이다. 지름 6㎝ 이상인 비자나무만 2878그루가 자라고 있다. 평균 47평에 한 그루 꼴이 서 있다.
싱싱한 나뭇잎, 거칠고 주름진 나무껍질, 그 나무껍질에 붙어 자라는 덩굴, 바닥엔 난초의 청초한 꽃, 천남성의 기괴한 꽃, 산딸기 종류들의 하얀 꽃, 정말로 다양한 이런 자연들을 보면서 걸었다. 더불어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자기 발소리 같은 시끄럽지 않은 소리도 들린다. 이 숲의 또 다른 점은 독특한 향기다. 많은 향기 중에서 가장 강한 향은 뭐니 뭐니 해도 비자나무 향기다. 다음은 상산이라고 하는 운향과의 나무 향기다. 그 외에도 여러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요즘은 이것들을 피톤치드라고 아주 과학적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식물들에서 나는 향기만이 아니라 흙냄새도 있고 식물이 썩어가면서 나는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 숲에 살고 있는 나무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것은 서기 1117년생이라고 한다. 평균 나이는 320살 정도이다. 나무의 키는 가장 큰 것이 16m에 달하지만 대부분은 11~13m, 지름은 40~70㎝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울창한 숲이지만 정작 이 곳은 주로 돌멩이로 돼 있어 과거 농사에도 목축에도 적합하지 않은 쓸모없는 땅이었다.
이 나무의 목재는 습기에 강해 관재로, 선박재로 많이 쓰였다. 부여 능산리 고분 출도 관, 1984년 완도군 약산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11세기 선박의 외판, 청해진 유적지 완도 장좌리 목책이 비자나무라고 한다. 바둑판으로도 유명하다. 1994년 일본의 한 소장자가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의 비자나무 바둑판을 한국기원에 기증한 바 있다. 병력 4만 명, 전함 900척을 동원한 1274년과 1281년 등 두 차례의 여몽연합군 일본정벌에 동원 됐던 배들도 상당수 제주도에서 만들어졌다. 제주도는 서기 1629년(인조7년) 제주도민은 육지로 와선 안된다는 출륙금지정책이 있기 전까지는 대형의 선박들이 만들어지던 조선기지였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많은 목재가 소비됐다. 비자나무 열매는 구충제로서 고려와 조선시대엔 공물로 진상했다는 기록이 빈번하게 보인다. 지나치게 많은 양을 요구해 참다못한 주민들이 비자나무들을 많이 잘라 버렸다. 일제강점기엔 많은 산림자원의 수탈이 자행됐다. 현대사의 비극 4·3사건 때에는 수많은 숲이 불탔다. 평화로운 비자나무숲엔 이와 같은 고난의 역사를 견딘 이야기가 있다.
비자나무숲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비자나무숲만을 보더라도 이 숲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제주도에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숲으로 견뎌낸 나무는 없다. 전국적으로도 없다. 선조들의 선물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비자나무숲은 합장을 받을 만하다.
<김찬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박사>
싱싱한 나뭇잎, 거칠고 주름진 나무껍질, 그 나무껍질에 붙어 자라는 덩굴, 바닥엔 난초의 청초한 꽃, 천남성의 기괴한 꽃, 산딸기 종류들의 하얀 꽃, 정말로 다양한 이런 자연들을 보면서 걸었다. 더불어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자기 발소리 같은 시끄럽지 않은 소리도 들린다. 이 숲의 또 다른 점은 독특한 향기다. 많은 향기 중에서 가장 강한 향은 뭐니 뭐니 해도 비자나무 향기다. 다음은 상산이라고 하는 운향과의 나무 향기다. 그 외에도 여러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요즘은 이것들을 피톤치드라고 아주 과학적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식물들에서 나는 향기만이 아니라 흙냄새도 있고 식물이 썩어가면서 나는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 숲에 살고 있는 나무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것은 서기 1117년생이라고 한다. 평균 나이는 320살 정도이다. 나무의 키는 가장 큰 것이 16m에 달하지만 대부분은 11~13m, 지름은 40~70㎝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울창한 숲이지만 정작 이 곳은 주로 돌멩이로 돼 있어 과거 농사에도 목축에도 적합하지 않은 쓸모없는 땅이었다.
이 나무의 목재는 습기에 강해 관재로, 선박재로 많이 쓰였다. 부여 능산리 고분 출도 관, 1984년 완도군 약산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11세기 선박의 외판, 청해진 유적지 완도 장좌리 목책이 비자나무라고 한다. 바둑판으로도 유명하다. 1994년 일본의 한 소장자가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의 비자나무 바둑판을 한국기원에 기증한 바 있다. 병력 4만 명, 전함 900척을 동원한 1274년과 1281년 등 두 차례의 여몽연합군 일본정벌에 동원 됐던 배들도 상당수 제주도에서 만들어졌다. 제주도는 서기 1629년(인조7년) 제주도민은 육지로 와선 안된다는 출륙금지정책이 있기 전까지는 대형의 선박들이 만들어지던 조선기지였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많은 목재가 소비됐다. 비자나무 열매는 구충제로서 고려와 조선시대엔 공물로 진상했다는 기록이 빈번하게 보인다. 지나치게 많은 양을 요구해 참다못한 주민들이 비자나무들을 많이 잘라 버렸다. 일제강점기엔 많은 산림자원의 수탈이 자행됐다. 현대사의 비극 4·3사건 때에는 수많은 숲이 불탔다. 평화로운 비자나무숲엔 이와 같은 고난의 역사를 견딘 이야기가 있다.
비자나무숲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비자나무숲만을 보더라도 이 숲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제주도에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숲으로 견뎌낸 나무는 없다. 전국적으로도 없다. 선조들의 선물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비자나무숲은 합장을 받을 만하다.
<김찬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