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담론]'해상왕국' 탐라정신 부활은 이제 시작
입력 : 2013. 02. 28(목) 00:00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근원에 대해 스스로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폴 고갱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물었다.

나도 가끔 우리 제주인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가 있다.

우리 제주인은 탐라의 후예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탐라의 실체에 관해서는 '잃어버린 천년'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다.

탐라가 고려 숙종 10년(1105)에 복속되기 이전까지 단순히 절해고도의 섬나라였을까 아니면 해상왕국이었을까. 퍼즐을 맞추듯, 고문헌과 각종 유물을 보면 어렴풋이 탐라국의 실체가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들춘다면 우선 당나라 대 문장가이자 사상가인 한유의 문집 '창여집'을 꼽을 수 있다.

그 문집에는 당시 한나라와 교역했던 나라들을 거론하면서 '탐라의 상선이 광주에 폭주한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탐부라(제주), 유구(오키나와), 모인이전지주(지금의 일본), 임읍(월남 다낭항 일대) 등 수많은 나라들이 바다를 통해 교역"을 했는데, 여러 나라 중에 탐라를 가장 먼저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탐라가 한반도를 넘어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활발히 교류했던 해상왕국이었다는 반증이자, 당나라의 주요 교역국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었다는 황룡사 9층탑의 비밀에서도 탐라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이웃나라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지어진 이 탑은 층마다 적국 9개 나라를 상징하는데,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황화강, 4층이 바로 탐라를 말한다. 그렇다면 6~7세기경 탐라국은 이미 신라로부터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던 해상왕국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일본서기' 등 여러 문헌에서 탐라는 '배를 타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 '일본에 말린 전복과 사슴고기 등을 수출하고 그곳에서 철제기구와 비단 등을 수입해 갔다'는 기록들과도 만날 수 있다. 또한 섬나라로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조선술과 항해술도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보인다.

비록 문헌들 뿐만 아니다. 유물에서도 탐라국의 실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1920년대 산지항 축조공사 당시 발견된 오수전 등 전한시대의 화폐와 청동거울 등은 고대탐라가 '오수전 교역로' 상에 놓였던 해상교역국가였음을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 탐라의 실체에 접근할 수록 타원형의 수평선을 뛰어넘어 이웃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해상왕국 탐라인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2012탐라대전을 개최했던 취지도 여기에 있다. 해상왕국 탐라의 혼과 기백을 21세기 제주의 중심 가치로 승화시켜 도민이 행복한 국제자유도시 건설의 동력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도에는 항상 위험부담이 따르고 치러야 할 수업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늘 변화 없이, 발전 없이, 있는 그대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탐라정신의 부활은 이제 시작이다. 올해 제52회 탐라문화제에서도 탐라의 혼과 기백을 계승하려는 노력은 계속 될 것이다. 탐라문화제를 도민의 종합문화예술축전으로, 제주의 대표축제로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탐라,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이명도 제주자치도 문화관광스포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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